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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화영의 골프장 인문학 27] 일본 최고 클럽의 자존심 도쿄GC
뉴스| 2018-12-19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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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닌 레이몬드가 63년 설계한 도쿄GC 클럽하우스


[헤럴드경제 스포츠팀=남화영 기자] 일본에서 클럽으로서의 자존심이 가장 높은 골프장은 도쿄(東京)골프클럽(GC)이다. 오늘날 일본을 움직이는 정재계의 최고 리더들이 회원으로 있는 곳이면서 가장 오랜 자체 대회를 개최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회원이자 일본골프협회(JGA)주니어 강화위원인 모리오카 씨의 초청으로 라운드를 했다. 세계의 골프장 정보사이트인 톱100골프코스(top100golfcourses.com)에 따르면 도쿄GC는 일본에서는 5위, 아시아에서는 8위에 랭크되어 있다. 폐쇄적인 프라이빗 골프장으로 치면 일본 어디에도 도쿄GC만한 곳이 없을 정도다.

1913년 설립된 클럽
도쿄골프클럽의 로고나 각종 장식물을 보면 1913이란 개장 연도가 새겨져 있다. 일본에 가장 먼저 만들어진 골프장은 1903년 고베의 료코산(六甲山)에 만들어진 고베골프클럽이다. 하지만 고베GC가 당시 개항지였던 고베에서 아더 해스킷 그룸이라는 영국인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도쿄GC는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개화파 일본인들에 의해 조성되었다는 점이 다르다.

1868년의 메이지 유신이 촉발한 근대화로 1876년에 미국 유학을 떠났던 일본의 첫 번째 골퍼 아라이 요이치로에게서 배운 이노우에 주노스케가 주도해 30명 발기인을 중심으로 1913년에 도쿄 골프클럽이 결성되었고, 이듬해 현재의 고마자와(駒澤) 올림픽공원 부지를 빌려 18홀 코스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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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일본아마추어선수권 우승자를 배출하고 이들이 회원이었던 도쿄GC.


고베나 오사카가 개항에 따른 대외 상공인들이 중심이 된 골프 문화를 키워나갔다면 도쿄GC는 정치적이고 외교적이었다. 1916년에 첫 이사장을 영미 대사(大使)를 뽑았을 정도였다. 일본이 서구 열강과 교류하는 사교장이 바로 도쿄GC였다. 1922년 영국의 왕세자 에드워드 8세가 방일했을 때 일본 황태자와 골프시합을 개최한 것이 대표적이다. 1924년엔 이곳에서 7개 골프장 대표가 모인 자리에서 일본골프협회(JGA)가 창설된다. 1928년에 제2회 일본오픈을 개최하는 등 도쿄GC는 명성을 쌓았다. 급기야 1929년에는 임차한 부지인 고마자와 코스를 대신해 사이타마에 위치한 아사카(朝霞)로 코스를 옮기기로 결정한다.

당시 일본에 머물던 영국의 코스 설계가 찰스 엘리슨에게 디자인을 맡겨 1932년에 아사카의 도쿄GC가 개장했다. 공들여 조성한 이 코스는 8년밖에 운영되지 못했다. 일제가 진주만 폭격과 함께 태평양전쟁을 앞둔 1940년에 코스를 군인 양성 아카데미로 변경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골프장은 시 외곽으로 쫓겨나게 된다. 즉 1940년 10월에 오늘날의 카시와바라 부지에 있던 치치부(秩父)컨트리클럽으로 옮겨 합병된 것이다. 마치 1972년 군자리코스에 있던 서울컨트리클럽이 대통령령에 따라 고양시 한양컨트리클럽으로 쫓겨나 서울한양CC로 합병된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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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관에 전시된 각종 대회 트로피들.


길 한스의 리노베이션
일본 설계가 코묘 오타니에 의해 조성된 치치부는 남북 코스 36홀이었으나 오늘날 남 코스만 살아남아 오늘날의 도쿄GC가 됐다. 북코스는 2차 세계대전이 극에 이른 1943년에 농경지로 바뀌었다. 이렇듯 도쿄GC는 부지를 세 번이나 옮기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따라서 그들이 붙잡고 있는 가치는 골프클럽이 창립됐던 1913년이다.

세계 2차 대전이 끝나고 승전국인 미국이 관할하던 골프장은 1952년에 일본에 반환되었다. 옛 회원을 맞이한 이 골프장은 이후 1963년에 클럽 창립 50주년을 맞으면서 빠르게 옛 모습을 찾았다. 1932년에 클럽하우스를 만들었던 미국의 건축가 안토닌 레이몬드를 초빙해 그해에 클럽하우스를 재건축했다.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에는 75주년 기념식을 거행했다.

2006년에는 클럽하우스 한 편에 기증받는 물품과 사료를 모아 역사 자료실을 조성했고, 2010년에 길 한스를 초빙해 1차 코스 개조를 단행하기에 이른다. 이후 5년이 지나서 길 한스가 다시 초빙되어 두 번째 코스 개조를 통해 벙커 등을 정리했다. 2013년에는 클럽 창립 100주년을 맞았고, 일본아마추어선수권을 열기도 했다.

두 곳의 골프장이 합병된 오늘날의 도쿄GC는 아사카(6915야드)-치치부(知知夫 6865야드) 코스라는 티잉그라운드 이름으로만 남았다. 18홀 코스지만 이곳은 두 개의 그린 시스템을 고수하고 있다. 일본과 한국의 옛 코스에서 흔히 보던 투그린 시스템과는 다르다. 홀은 18개지만 36개의 그린에 파3 홀에서는 티잉 그라운드도 두 개씩을 갖추고 있다. 두 개의 그린은 서로 완전히 독립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 한스의 개조 작업 역시 이들 그린의 독립성을 살리고 경기성을 높이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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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잉그라운드에 아사카- 치치부 그린까지의 야디지가 표시되어 있다. 개울이 지나는 6번 홀.


정재계 엘리트의 은거지
2층 구조의 클럽하우스에 들어서면 로비 입구에 일본 전통의 가레산스이(枯山水) 정원이 골퍼를 맞이한다. 건물 중정(中庭)에 흰 모래로 조성한 인공 산수가 고요하면서 정중한 클럽하우스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층으로 올라가면 멤버 응접실 옆으로 역사관이 있다.

골프장에 역사 전시관을 별도로 갖춘 골프장은 극히 드물다. 이 골프장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근대화의 선구자들이 만든 클럽으로 일본 골프 역사를 이끌어왔다는 엘리트의 전통이 면면히 흐른다. 코스는 고마자와-아사카를 거쳐 세 번이나 옮겨 다녔지만 일본을 이끈 엘리트들이 이끌어온 클럽이라는 자존심은 역사관에서 진하게 나타난다.

진열된 12개의 대회 트로피가 이 클럽의 전통을 웅변한다. 총 600여명의 회원이 있는데 매년 12개의 대회를 빠뜨리지 않고 개최한다. 가장 오랜 클럽선수권은 1916년에 시작되어 전쟁과 코스 이전으로 중단된 7년을 빼면 2022년이면 100주년 대회를 맞이한다. 1922년 영국 왕태자가 와서 시작한 프린스오프웨일즈컵도 매년 열린다.

전통을 중시하는 도쿄GC의 회원들은 클럽하우스 안에서는 골프장 로고가 새겨진 재킷을 입어야 한다. 마스터스를 개최하는 오거스타내셔널 등 미국의 전통 골프장에서나 지켜지는 전통이 이곳에서는 현재진행형이다. 오늘날 일본의 정재계 엘리트들이 회원을 구성하고 그들은 이곳을 은거지 삼아 휴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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훤칠한 키에 서글서글한 인상의 모리오카 씨는 도쿄GC의 19년째 회원이다.


함께 라운드한 모리오카씨는 184cm의 훤칠한 키에 어프로치 샷이 예술적이었다. 그는 몇 년 전까지 제주도의 CJ나인브릿지에서 월드클럽챔피언십(WCC)이 열리면 일본GC를 대표해 출전하곤 했다. 이 골프장에서 19년째 회원으로 있다는 그는 6살에 시작해 구력만 46년이라고 했다.

이곳은 일본아마추어선수권에서 우승한 고수들이 회원으로 많이 가입해 있다. 1918년 우승한 이노우에 노보루를 시작으로 12명의 회원이 22번 우승했다. 일본아마추어선수권도 총 9번 개최했다. 우리가 라운드하던 날 바로 앞 조가 다케다 쯔네타다 JGA 회장이었다. 그는 도쿄GC의 이사장이기도 했다.

정중동의 레이아웃
도쿄GC는 2020년 하계 도쿄 올림픽 개최코스인 가스미가세키골프장과 맞닿아 있다. 10번 홀 그린과 11번 홀 페어웨이까지가 가스미가세키 서 코스와 마주보고 있다. 두 골프장 회원들은 내색은 안하지만 강한 경쟁심을 가지고 있다. 회원수는 36홀인 가스미가세키가 훨씬 많기 때문에 도쿄GC회원들은 ‘가스미가세키는 복작거리는 퍼블릭 코스’라고 비꼰다. 그러면서 더욱 은밀한 엘리트의 정원으로 남으려 한다.

<아시아-호주의 명문 코스>를 쓴 유명 골프 칼럼니스트 제임스 스펜스는 수십년 전에 이 코스를 돌아보고 엘리슨을 계승한 영국 스타일의 퓨전 코스라고 평가했다. “도쿄GC는 길지는 않지만 파를 잘 방어하고 있다. 영국에서 공부한 오타니는 런던 샌드밸트 지역의 특성을 도쿄클럽에 잘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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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이 벙커 사이에 섬처럼 떠 있는 14번 홀.


하지만 오늘날 코스는 미국 스타일에 더 가깝다. 2010년부터 코스 개조를 하고 있는 길 한스의 작업은 10년을 맞는 2019년에 완성된다. 한스의 리노베이션은 얌전한 정원같은 스타일에 다이내믹함을 덧칠했다. 특히 그린 주변의 벙커들과 출렁거리는 그린 언듈레이션은 도쿄GC를 차분함 속의 치열한 전쟁터로 만들어놓은 듯하다. 그린 스피드는 평일에도 엄청나게 빨랐다. 경사진 그린에서 한 퍼트가 에지까지 굴러내려가기도 했다.

도쿄GC의 후반 13~16번 네 개 홀은 벙커가 그야말로 그날 타수의 절반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3번 홀 페어웨이 벙커 군락은 파도가 밀려오는 듯 입구가 낮고 뒤가 높은 형상이다. 14번 홀에선 티샷을 잘 보내 언덕을 넘으면 벙커들의 바다 속에 그린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모양새다. 15번 홀은 티잉 그라운드에서는 벙커밖에 안 보이는 듯 하지만 막상 가보면 넉넉한 페어웨이가 볼을 받아주는 착시(錯視)를 절묘하게 활용했다. 16번 홀은 볼록한 그린 주변에 벙커들이 요새처럼 막아선다.

라운드를 마치고나면 코스는 고요하기 이를 데 없지만 마치 큰 모험을 하고 온 듯한 자족감이 넘친다. 한홀 한홀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정중동(靜中動)의 미학을 구현하고 있다. 현재 이 코스는 2017년 <골프매거진>의 세계 100대 코스에서 99위에 올라 있고, 톱100골프코스에서는 2년 전에 97위였다가 지금은 100위 밖으로 밀려난 상태다. 길 한스의 코스 개조가 끝나는 내년이면 순위는 아마도 더 올라갈 수 있을 것 같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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