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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단체장 운운하는 사람은 뽑으면 안 된다
뉴스| 2019-11-30 05:25

# 40대 중반이 넘은 중년들에게는 이런 기억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초등학교(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의 신학기가 되면 담임선생님이 들어와 “반장은 000이 해라”라고 한 마디 툭 던지는 경험이. 000은 대부분 부잣집 아들로 어머니가 학부모활동에 협조적이거나, 그도 아니면 ‘반 1등’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선거와 민주주의 성숙도가 아시아 최고를 자랑하는 지금의 한국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지만 예전에는 그랬다. 독재시절에는 지성의 전당인 대학에도 학생회가 없었으니 '임명반장'도의 황당한 과거지사 중 하나일 것이다.

# 위의 스토리로 살짝 가상상황을 만들어보자(과도기에 실제로 있었을 수도 있다). 학생 자치활동의 수장을 교사나 학교가 임명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지적에 반장선거가 실시되게 됐다. 그런데 교사는 여전히 ‘자기가 원하는 반장’이 있고, 선거에서 그 학생이 당선되기를 바란다. 교사가 대놓고 000을 지지한다고 공언하면 문제가 되니, 몇몇 아이들을 통해 ‘반장은 000이 되야 한다는 것이 선생님의 뜻’을 퍼트린다. 심지어 ‘000 말고 다른 애가 반장이 되면 우리 반이 아주 피곤해질 거래’라는 협박성 분위기까지 만든다. 이는 선거 자체를 부정하는 범죄에 가까운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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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지방자치단체의 체육회는 새로운 민선 체육회장을 내년 1월 15일까지 선출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이와 같은 ‘황당 반장선거’가 지금 한국의 풀뿌리체육에서 발생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국민체육진흥법 일부개정법률안’이 통과되면서 지방단체장(시장, 도지사, 구청장, 군수)이 체육회장을 겸할 수 없게 됐고, 새로운 민간체육회장은 내년 1월 15일까지 뽑아야하기 때문이다( 2013년부터 국회법에 따라 이미 국회의원은 체육단체장을 맡을 수 없다). 입법 정신은 체육을 정치의 하위변수에 떼어내 독립성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광역단체장과 기초단체장이 겸했던 체육회장을 선거로 뽑게 되자 당사자인 체육인은 물론이고, 선출직에서 밀려나 있는 지역 정치인(혹은 지망생)들까지 가세하며 우리지역 체육회장을 향한 열기가 아주 뜨겁다. 전국적으로 지역별 체육회장 선거마다 작게는 2~3명에서 많게는 5명 이상까지 후보들이 자천타천으로 거론되고 있다.

다양한 후보들이 있지만 선거열기가 뜨거워지면 구도(정치부 기자들에게 물어보니 선거는 구도가 중요하고 한다)는 ‘현 단체장쪽’과 ‘그렇지 않은 쪽’으로 나눠지고 있다. ‘시장(혹은 도지사나 군수)이 000을 밀고 있다’, ‘000이 체육회장이 되면 예산 제대로 받지 못해 곤욕을 치를 것’ 등의 소문이 어느 지역 할 것 없이 ‘정설’로 퍼지고 있다. 현 체육회장인 단체장이 실제로 특정후보를 지지하고 있는 정황이 포착되기도 하고, 혹은 특정후보가 ‘내가 시장쪽 사람’이라고 자가발전을 돌리기도 한다. 심지어 단체장의 정당에 따라 지역정당조직이 가동된다는 얘기도 있다.

모두 지방체육회 예산의 95% 이상 해당 지방단체에 의존하기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들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이럴 거면 그냥 단체장이 계속 체육회장을 하지 뭐하러 수고스럽게 선거를 하냐는 푸념까지 나온다.

그렇다면 이제 해결은 유권자인 체육인들의 손에 달렸다. '황당 반장선거'의 논리에 놀아난다면 체육은 결코 정치의 심부름꾼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번 선거에서 단체장 운운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뜻과는 반대로 투표권을 던져야 한다. 철저하게 해당 후보가 체육계에서 어떤 일을 해왔고, 어떤 비전을 가지고 있는지만 보면 된다.

그리고 지방자치단체가 체육계에 지원하는 돈은 단체장의 개인돈이 아니다. 그 지역의 체육인과 주민에게 권리가 있다. 이걸 빌미로 선거에 개입하는 단체장은 그 자체로 당장 탄핵돼야 한다. 오히려 해당 단체장은 지금 자신의 이름을 팔고 다니는 체육회장 후보가 있다면 엄중히 경고해야 한다. 세상 무서운 줄 알아야 한다.

참고로 원래 순서를 바꿔 선거 전에 마련됐어야 하는 일이지만, 지난 지방체육회의 법정법인화를 골자로 한 지방체육회 예산의 안정성 확보를 위한 국민체육진흥법 개정안이 발의돼 있다. 어차피 정치(단체장)에 휘둘리지 않고, 체육인들 스스로가 체육발전을 도모하는 체육행정은 시대의 큰 물줄기다. 2020년 한국 지방체육의 수준을 스스로 70, 80년대 초등학교 반장선거로 떨어뜨리는 어리석음은 없었으면 한다. [헤럴드경제 스포츠팀=유병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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