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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건식의 도의상마] ‘70년 검도인생’ 전영술 사범
뉴스| 2018-10-24 0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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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전주종합운동장 건설 장면. [사진=국가기록원]


호남검도의 개척자 전맹호 사범


올해 제99회 전국체육대회(전국체전)는 전북에서 개최되었다. 전국체전의 역사에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은 대회로 1963년 전주에서 열린 제44회 대회가 있다. 종합운동장이 없었고, 숙박시설도 없던 시절이다. 전국에서 6,000여 명의 선수단이 참여하는 이 대회를 준비하는 당시 전북도민들은 고민이 많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전북도민들이 팔을 걷고 동참했다. 성금을 모아 덕진종합운동장을 건립하고, 도민들이 나서서 민박으로 숙박시설을 해결했다. 흥미롭게도 이 민박 등을 통해 전북의 음식이 전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어쨌든 대회는 성공적으로 치러졌고, 지금까지 ‘민박체전’과 ‘인정체전’으로 한국체육사에 남아 있다.

전북의 체육사랑은 6·25전쟁 이후 1960년대 체육지도자들의 헌신적인 봉사가 없었으면 힘들었을 것이다. 대표적인 무예인으로는 태권도의 전일섭 사범과 검도의 전맹호 사범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전북에 정착하면서 전북체육의 절정기를 만들었다. 태권도는 ‘지도관’을 기반했는데, 이는 현재 전북 지방무형유문화재로 등재되었고, 검도는 전맹호 사범이 전주에 정착하면서 전국 최강 검도역사를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올림픽 종목인 레슬링은 안광열에 의해 전북에 뿌리를 내렸으며, 1970년대에는 전국체전에서 10연패의 위엄을 달성하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84LA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유인탁, 88서울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김태우 등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전북 출신의 선수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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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서중 교사 시절의 전맹호 사범과 제자들. [동아일보 1971년 9월 19일자 8면]


호남검도의 개척자로 불리는 전맹호 사범에 집중해 보자. 1972년 9월 18일 새벽 전주서중 숙직실에서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는 전북검도를 전국 최강팀으로 끌어올린 주역이다. 전국체전에서 8번이나 우승을 차지한 기록으로 유명하다.

전맹호 사범은 해방 이후 전북 검도를 일으켰다. 그는 해방 직후 검도 4단으로 당시 4명뿐이던 고단자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큰아들 전영술 사범을 비롯한 아들 4명은 모두 검도선수로 활동하며 전북 검도발전에 기여했다. 한 마디로 ‘검도명가’다. 1960년대 검도대회장의 최고 인기는 전맹호 사범의 가족이었다. 1967년 10월 6일자 매일경제는 ‘검도대회장엔 ‘검도4부자’가 출전, 관중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다. 전북대표로 나온 이들 4부자는 전맹호 씨(48 6단 전주서중교사)와 아들 영술(25 3단 육사조교), 영태(22 2단 청룡부대), 영수(14 초단 전주서중) 등 3형제. 금년대회엔 월남에 가 있는 영태군을 제외하고 3부자만이 출전했는데 어찌나 다정하고 열의기 있는지 검도인은 물론, 관중들도 이들(검도4부자)가 연습하는 광경을 구경하느라고 진짜 시합엔 한눈을 팔 정도”라고 보도했다.

전영술 사범은 초등학교시절부터 중등부와 고등부를 상대로 우승을 차지한 경력을 시작으로 국가대표 선수와 코치, 감독을 했고, 둘째인 전영태 사범은 전수서중과 전주고에서 선수생활을 했으며, 셋째인 전영수 사범 역시 전주서중과 해성고에서 선수생활을 했다. 여기에 넷째인 전영조 사범도 전주서중과 해성고, 그리고 전북대에서 선수를 해 5부자 검도가족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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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술 사범(검도 8단, 76세).


전설이 된 검도사범


이번에는 전영술 사범(검도 8단, 76세)을 집중적으로 보자. 그는 검도 외길인생을 살아온 원로사범이다. 한국체육사와 무예사에서 신화적인 존재로 평가받기도 한다. 소문은 들었지만 좀처럼 만나 뵙기 힘들다는 것이 학계나 연구자들의 이야기다. 그리고 만났어도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전영술 사범은 역대 가장 많은 고단자와 국가대표를 양성했고, 경찰무도대회 우승 등을 통해 빠른 승단을 했다. 6살 때 시작한 검도를 70년 동안 끊임없이 지금도 수련하고 있다. 전영술사범은 전자에서 언급한 검도고단자였던 부친인 전맹호 사범(1919~1972, 8단)의 영향을 받았다.

꼬마 전영술은 1950년대초 6살 때부터 당시 전북 금산경찰서 검도사범이었던 부친의 손에 이끌려 검도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하기 싫고 괴로웠으나, 검도 70년 인생을 살면서 지금은 매일 수련하는 삶이 되어 버렸다. 1955년에 부친이 전주경찰서 검도사범으로 옮기면서 전주초등학교로 전학해 본격적인 검도수련을 하였다.

초등학생이 중고생을 이기고 우승

전영술 사범의 전설은 1958년 서울 경무대 시합으로 유명하다. 전 사범은 1958년 초등학교 6학년시절 경무대에서 개최된 이승만 대통령탄신일 기념 무술대회에 전북 학생대표 검도선수로 출전한다. 이 경기에서 초등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중학생과 고등학생을 이기며 1위를 차지하는 이변을 일으킨다. 이 모습을 지켜본 이승만 대통령은 “국내 검도발전을 이끌어야 한다”고 격려하기도 했다.

전 사범은 이 당시를 회상하며 이승만 대통령이 바라보는 검도에 인식을 잠시 들려주었다. 이 대통령은 검도를 일제의 무도로 상당히 싫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경무대 서정학 사범이 “일본을 이기기 위해 검도는 꼭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이 대통령은 검도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사라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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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경무대에서 개최된 무술대회.대련 중인 두 선수의 바로 앞, 등을 보이고 있는 이가 전영술 사범이다.


경찰 대신 검도사범

전영술의 검도인생은 경찰 무도사범이 되면서 불이 붙기 시작했다. 순경으로 출발한 경찰공무원이었지만 매년 개최되는 전국경찰무도대회에서 1위를 차지하며 1계급 특진을 거듭하면서 최단시간 경위까지 진급했다. 단별선수권대회의 첫 우승은 1961년 10월 13일과 14일 서울 용산고 강당에서 개최된 제1회 전국검도단별선수권대회 기록에 나와 있다. 전 사범은 초단부 결승전에서 전북의 김택준을 맞이해 2-1로 우승을 차지하며 2단에 승단한다. 그는 전국단별선수권대회의 우승을 통해 초단에서 6단까지 최연소 승단하는 기록도 가지고 있다.

전 사범은 1961년부터 무도 경찰로 전북 상무관에서 검도를 지도했다. 1970년부터 세계검도선수권대회가 시작되어 4차례 국가대표 선수와 두 차례의 국가대표 코치, 그리고 두 차례의 국가대표 감독을 맡으며 엘리트 검도인으로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지금처럼 개인도장이 없던 1980년대까지 전북검도는 상무관을 중심으로 보급되었다. 특이한 것은 검도를 무료로 지도했다는 점이다. 전 사범의 검도에 대한 애착은 제자인 황태영 박사(쌍방울그룹 미래전략실 이사)를 통해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선생님은 기술검도를 하셨다. 중학교시절이면 보통 기본기를 중심으로 지도하는데, 손목을 치고 빼서 다시 손목을 치는 고급기술을 지도한 것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지금 생각해보면, 검리를 통한 고급기술을 가르친 것이다. 기본이 충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기술들이었다. 무엇보다 슬기로운 검도라고 말할 수 있다. 창의력을 강조했고, 매 수련 때마다 연구하는 자세로 제자들과 함께 했다. 중단세를 지도할 때도 과학적인 근거로 접근했다. 칼끝과 중단세의 개념이 아니라, 상대가 공격하지 못하는 중단세를 강조했고, 다양한 기술을 연구하고 직접 가르치다 보니 당시에 심판들도 당황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마디로 고급스러우면서 세련되었고 깔끔한 칼이었다.”

검도기술이 단조로울 시기에 기술을 개발하고 기술검도를 지도할 수 있었던 전 사범은 대한검도회에서 기술연구분과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황박사는 전 사범의 검도사랑에 대해 가슴 뭉클한 이야기를 소개했다.

“중학생시절, 경찰이었던 선생님께서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자, 운동 후 우리들과 이야기를 했다.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게 되면 우리와 떨어져야 하고, 검도를 더 이상 지도할 수 없는 여건이라는 이야기였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물으셨다. 그리고 며칠뒤 선생님은 경찰을 그만 두시고 학교에 남아 우리를 지도했다.”

황 박사의 이야기처럼 전영술은 경찰이 아닌 ‘영원한 검도사범’을 택한 것이다. 이러한 검도의 애정은 1980년대 국가대표의 70% 이상을 제자들이 선발되었고, 1980년대 우리나라 검도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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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스승의 날 전북대 검도부 제자들과 합동훈련 후 기념사진을 찍은 전영술 사범. [사진=동방검도관 이성근]


검도를 하면 기분(氣分)이 좋다

직접 저녁을 사겠다는 전 사범이 우리를 데려간 곳은 전주에서 유명한 순대집이었다. 전북 전주에 오면 꼭 들려 보라는 그 집은 전북의 인심이 가득한 집이었다. 한두 잔 술이 오가고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은 70 평생 검도를 하시면서 선생님 인생에 검도는 무엇입니까?”
“어려서는 아버지에게 이끌려 가기 싫은 검도장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삶이 되어 버렸어. 내게 검도는 ‘기분(氣分)’이야. 검도를 할 때만큼은 기분이 좋아져. 나의 삶을 이끌어가는 기분 좋은 운동이지”

이 말에 전사범의 검도 70년 철학이 담겨 있다. 그리고 외모 역시 꼿꼿한 자세와 맑은 눈빛, 그리고 말 한마디 한마디가 신중하면서도 친근감을 주었다.

전영술 사범이 이야기하는 기분(氣分)이란 무엇일까? 철학자 하이데거는 “기분이란 일종의 우리가 잠겨있는 정동적인 분위기(affective atmosphere)이다. 그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 느끼는 연관 혹은 그것의 결핍과 더불어 사태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중요한지를 밝혀준다”고 했다. 검도가 삶이 되면서 전 사범은 많은 제자들에게 정중동(靜中動)과 동중정(動中靜)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표면적으로는 조용한 가운데 내면적으로는 부단히 움직임이고, 겉으로는 강하게 대치하고 있는 듯하면서도 속으로는 끊임없이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 기분 좋은 검도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99회 전국체전에서 70년 검도사범으로부터 꽤 훌륭한 가르침을 받아왔다.

* 허건식 박사는 용인대에서 무예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세계무예마스터십위원회, 유네스코 국제무예센터, 국립태권도박물관, 예원예술대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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