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후 자녀 보려고 변장한 '미세스 다웃파이어'

양육권 있어도 자녀 못 만나는 상반된 현실 아빠

가정부로 변장한 아빠 vs 강남역 런닝머신 걷는 아빠[이현정의 현실 시네마]
영화 미세스 다웃파이어(왼쪽)과 서울 강남역 인근에서 런닝머신을 걷고 있는 존 빈센트 시치(52) 씨. [미세스 다웃파이어 포스터, 이현정 기자]

[헤럴드경제=이현정 기자]삼남매의 아빠이자 만화영화 더빙 성우인 다니엘. 아이들에겐 한없이 다정한 아빠지만 남편으로선 사랑받지 못합니다. 다니엘은 14년간 실직만 반복하며 경제적으로 무능했기 때문이죠. 이에 지친 아내는 끝내 이혼을 선택합니다. 다니엘은 하루 아침에 삼남매의 양육권이 뺏기고, 일주일에 한 번만 아이들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니엘은 아내가 가정부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본인이 할머니 가정부 '다웃파이어'로 변장해 가정부로 들어갑니다. 다니엘이 아이들을 살갑게 챙기고 집안일까지 척척 해내면서 아내는 가정부에게 더욱 의지하게 되죠. 시간이 지날수록 다니엘은 아내가 자신으로 인해 얼마나 힘들었는지 조금씩 이해하게 됩니다.

가정부로 변장한 아빠 vs 강남역 런닝머신 걷는 아빠[이현정의 현실 시네마]

이 영화는 지난 1994년 개봉한 할리우드 코미디 가족 영화 '미세스 다웃파이어'입니다. 양육권이 뺏긴 아빠가 아이들을 보기 위해 가정부로 변신한다는 내용의 이 영화는 당시 북미와 해외에서 총 4억4100만달러를 벌어 들였습니다.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작품상, 아카데미 분장상을 수상하는 등 작품성도 인정 받았죠.

영화의 감동 포인트는 명배우 로빈 윌리엄스가 연기한 다니엘의 부성애였습니다. 가장으로서 경제적으로 무능력해도 아이들을 끔찍하게 아끼고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그 누구 못지 않았습니다. 그는 생일을 맞은 아이를 위해 집안이 난장판이 될 정도로 신나는 파티를 마련했고, 이혼 후 집을 떠나는 순간에도 아이들에게 장난치며 슬픔을 내색하지 않았죠.

현실엔 다니엘과 정반대의 상황에 놓인 아버지가 있습니다.

가정부로 변장한 아빠 vs 강남역 런닝머신 걷는 아빠[이현정의 현실 시네마]
존 빈센트 시치(52) 씨가 지난 19일 강남역 5번 출구 인근에서 런닝머신을 걷고 있다. [이현정 기자/rene@heraldcorp.com]

미국인 존 빈센트 시치(52)는 지난해 10월부터 강남역 5번 출구 인근에서 런닝머신을 걷고 있습니다.

런닝머신 곁에 놓인 '아이들이 너무 보고 싶습니다' 팻말, 아이들이 해맑게 웃고 있는 사진, 그에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시치의 결혼 생활은 행복했습니다. 그는 지난 201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인 여성과 결혼한 뒤, 2017년과 2018년에 각각 아들과 딸을 품에 안았습니다. 빅테크 회사의 엔지니어로 일하며 경제적으로도 풍족했죠. 그러던 어느 날, 아내는 2019년 11월 한국을 잠깐 다녀오겠다며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더니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가정부로 변장한 아빠 vs 강남역 런닝머신 걷는 아빠[이현정의 현실 시네마]
지난 19일 서울 강남역 인근에서 기자와 만난 존 빈센트 시치(52) 씨는 "지난해 10월부터 일주일 3일, 하루 3시간씩 런닝머신을 걷고 있다"고 말했다. 사진은 시치씨가 런닝머신을 걷고 있는 모습. 이현정 기자

시치는 아들의 세 번째 생일에 한국을 찾아 아내의 마음을 되돌리고자 애썼지만 아내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샌프란시스코 법원에 자녀들에 대한 양육권 청구 소송을 냈고, 양육권을 확보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지난 2020년 8월엔 서울가정법원에도 소송을 냈고, 법원은 헤이그 국제아동탈취협약(국제적 아동탈취의 민사적 측면의 협약)에 따라 아이들을 시치에게 돌려주는 것이 맞다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대법원 역시 원심 확정판결을 내렸습니다.

양국의 법원이 시치의 손을 들어줬지만 그는 여전히 아이들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아내가 계속 법원의 결정을 무시했기 때문이죠. 지난해 유아인도명령 강제집행 차원에서 집행관이 아이들을 찾아갔지만, 이마저도 엄마와 아이들의 의사에 반한다는 이유로 강제집행할 수 없었습니다. 법원이 내린 감치명령과 간접강제 배상명령도 소용 없었습니다.

가정부로 변장한 아빠 vs 강남역 런닝머신 걷는 아빠[이현정의 현실 시네마]
존 빈센트 시치(52) 씨가 지난 19일 강남역 5번 출구 인근에서 런닝머신을 걷고 있다. [이현정 기자/rene@heraldcorp.com]

양육권이 있어도 아이들을 만나지 못하는 시치는 그렇게 런닝머신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런닝머신을 고른 이유에 대해 "아무리 걸어도 아이들을 만날 수 없는 내 현실과 비슷하다"고 설명했습니다.

아내는 여전히 법원의 결정을 무시하며 이사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시치와 아이들의 만남도 차단했습니다. 아이들은 그나마 간간히 이뤄진 영상통화에서 "아빠 나쁘다", "아빠 더럽다"의 말만 반복했습니다. 이는 전형적인 '부모 따돌림'의 모습입니다. 부모 따돌림이란 한쪽 부모와 자녀의 만남을 일방적으로 차단하거나 그 부모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는 행위로 자녀의 정서 발달에 악영향을 끼치는 심리적 아동학대입니다.

가정부로 변장한 아빠 vs 강남역 런닝머신 걷는 아빠[이현정의 현실 시네마]
이현정 기자

시치는 올해 초 아내의 거주지를 겨우 확인했지만 한국 당국의 제한적인 협조에 아무 소득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경찰은 강제집행을 하기 꺼려했고, 법무부는 강제집행의 실질적 이행은 경찰의 책임이라며 도와주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아내는 그 사이 또 한 번 거주지를 옮겼습니다.

이젠 시치의 현 상황은 한미 양국 간의 외교 이슈로 비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미국 하원 외교 위원회는 오는 23일 예정된 청문회에서 시치의 자녀 약취 사건을 다룰 예정입니다.

미국 당국도 그를 돕기 위해 최근 한국 법무부·외교부 등과 태스크포스(TF)를 꾸린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시치가 요즘 배운 한국어는 과거와 크게 달라졌습니다.

그는 "예전엔 '사랑', '가족'과 같은 예쁜 단어를 많이 배웠는데 최근 들어선 '이혼', '소송', '부모 따돌림'과 같이 마음 아픈 단어만 쓰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하루 빨리 아이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 밖에 없다"며 간절함을 드러냈습니다.

시치는 언제쯤 자신의 아이들을 만날 수 있을까요? 그의 간절함이 하루 빨리 현실이 되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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