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 부산민심 달래기 행사
이 회장 등 총수 8명 깡통시장 동행
떡볶이·만두 먹으며 환한 모습 촬영
“초,분 단위 바쁜 총수들 왜 동원했나”
‘보여주기식 쇼 그만’ 등 뒷말들 무성
화제의 이 회장 ‘쉿’사진 여기서 나와
며칠간 여론을 가장 냄비 끓듯 후끈 달아오르게 한 게 있다면 단연 ‘이재용 떡볶이 사진’이다. 얼핏보면 즐거운 ‘먹방’ 사진인데, 이것이 ‘동원 논란’으로 번지면서 세간을 떠들석하게 만들었다.
배경은 이랬다. 부산엑스포 유치가 무산된 이후 부산 민심을 달래기 위해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6일 부산행 간담회를 가졌다. 윤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대선공약인 가덕도 신공항 건설과 산업은행의 부산 이전 등을 거듭 약속했다. 엑스포 불발로 상심한 부산과 시민들을 향해 남다른 애정을 강조한 행보였다. 부산엑스포 유치 실패 이후 “대통령인 저의 부족의 소치”, “정말 죄송하다”고 사과한 윤 대통령의 부산 행보라는 점에서 관심이 집중됐다.
근데 부산 재래시장인 중구 깡통시장에서의 한 장면이 눈길을 확 끌었다. 윤 대통령은 시장에 대기업 총수들을 대동했고, 그들과 함께 떡볶이, 만두 등을 먹으며 웃음꽃을 피웠다. 이 자리엔 국무위원과 여당 대표 및 의원들을 비롯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최재원 SK 수석부회장, 류진 풍산그룹 회장(한국경제인협회장),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 정기선 HD현대 부회장, 조현준 효성그룹 회장,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이 참석했다. 내로라 하는 그룹 총수 8명이 자리한 것이다. 윤 대통령은 이들 기업인들과 함께 시식하며 즐거운 대화를 이어갔는데 특히 이재용 회장 등과 떡볶이를 먹는 장면이 사진에 찍혔고, 특히 주목을 받은 것이다.
여론은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경제위기 속 글로벌경쟁을 향해 기업인들이 1분 1초가 아깝게 뛰어도 모자랄판에 한가하게 대통령 행사에 따라다녀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대통령실의 보여주기식 행사에 대기업 총수들이 집단 동원됐다고 꼬집는 시각이 많았다. 야당에선 비판 일색이었다. 전용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BBS 라디오 ‘전영신의 아침저널’ 인터뷰에서 “대통령으로서 부산 민심을 달래는 것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재벌을 들러리 세우고 함께 떡볶이 먹는 사진을 찍고…. 이건 누가봐도 보여주기식 쇼”라며 “그 바쁜 총수들을 부산으로 다 데리고 가 떡볶이 먹는 사진은 절대 저로선 이해가 불가능한 사항”이라고 했다. 여당에서도 의아스럽다는 반응이 나왔다. 허은아 국민의힘 의원은 “보통 해외 순방을 할 때는 총수들이 같이 갈 수는 있겠지만, 국내 행사에 이렇게까지 동원하게 되는 건 좀 이례적인 것 같다”고 했다.
부르면 만사 접고 달려가야하는 운명
진보 언론은 각을 세웠다. ‘쇼’로 치부했다. 특이한 점은 보수언론마저 윤 대통령의 이같은 행보에 낮은 점수를 매겼다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글로벌 대기업 총수들 집단 동원은 최소화되길’ 제목의 사설을 통해 “대통령과 재벌 총수의 떡볶이 먹는 사진은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역설적으로 한국이 얼마나 기업하기 힘든 나라인지를 한눈에 보여주는 듯했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이날 참석한 기업인 8명이 이끄는 그룹의 총매출액이 1000조원에 달한다는 점을 상기시겼다. 올해 정부 예산의 1.5배도 넘는 규모다. 사설은 “잠시라도 한눈 팔면 언제 밀려날지 모르는 글로벌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게 기업이다. 하지만 아무리 글로벌 기업이라 해도 대통령이 부르면 만사 제치고 참석해야 하는 것이 한국 실정”이라며 기업 총수 동원은 가급적 최소화하라고 주문했다.
대통령실은 과도한 해석을 경계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이날 부산 방문은 2030 세계박람회 유치는 불발됐지만 정재계가 함께 부산지역 경제 발전에 힘쓰겠다는 약속의 의미를 담았다”고 했다. 부산엑스포 유치를 위해 정재계가 힘을 합쳐 뛰었기에 무산이 됐어도 향후 다시 힘을 모아 부산을 위해 애쓰겠다는 상징성을 염두에 뒀다는 의미다.
‘떡볶이 사진’ 한장으로 이슈가 불붙은 것이지만, 사실 대통령 행사에 기업인들이 부름을 받은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정권이 바뀔때마다 ‘청와대(현 대통령실)-재계 ○대그룹 간담회’를 비롯해 대통령 순방이나 특정 국가적 행사에 기업인들은 초청장을 받았다. 초청이나 동행 형식이었지만, 받아들이는 측으로선 ‘동원’으로 여길 수 있는 상황도 적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예전 그룹 홍보맨들이 ‘회장님이 청와대 행사에 가는 의미가 뭐냐’는 질문에 “청(靑)이 부르면 안갈 수 있겠습니까. 괜히 밉보일 필요가 있나요”라고 답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대통령과 기업인의 만남과 동행, 그 자체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국정 책임자와 그룹 책임자의 윈-윈 동행은 글로벌시장에서 막대한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오는 11~15일 윤 대통령의 네덜란드 국빈 방문은 시선을 끈다. 여기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동행한다.
대통령실은 이번 방문 목표가 ‘반도체 동맹’이라고 했다. 네덜란드는 반도체 관련의 세계적 기업들 보유 국가다. 특히 반도체 장비기업 ASML이 유명한데, 반도체 초미세 공정에 필수인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생산하는 곳이다. 윤 대통령은 빌럼-알렉산더르 네덜란드 국왕, 이 회장, 최 회장과 함께 남동부 벨트호벤 소재의 ASML 본사를 방문할 예정이다. 반도체 공급망 확보가 절실한 상황에서 국내 대표기업 삼성, SK와 ASML 간의 협력네트워크 결실이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재계 관계자는 “세계는 지금 AI전쟁이 한창인데, 그 기본이 되는 게 반도체”라며 “한-네덜란드 반도체 동맹은 우리 기업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흥미로운 점은 역대정부에서도 기업 총수들에 대한 ‘콜’은 계속돼 왔고, 정권 색깔에 따라 그 모양새만 좀 달랐다는 것이다. 유독 가깝게 지낸 정부도 있었고, ‘불가근 불가원(가까이 하지도 않고 멀리 하지도 않음)’을 고수한 정부도 있었다. 다만 4강외교 중심의 정상회담을 위한 대통령 해외 순방땐 대부분 제법 규모가 큰 기업인 사절단이 동행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벌개혁’을 강조했다. 노 전 대통령이 대기업 총수들과 인사한 것은 취임 117일이 지난 후였다. 삼계탕집 노타이 차림의 만남으로 유명한 이 자리는 방미 수행 재계인사들에 대한 감사 형식이었기에 비공식적인 성격이 강했다. 노 전 대통령과 총수 18명과의 공식적인 만남은 취임 1년후의 오찬 회동이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유난히 ‘비즈니스 프랜들리’를 내세웠다. 공무원들에게 어디까지나 공무원은 ‘갑’이 아닌 ‘을’이며 기업 도우미여야 한다고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당선 후 9일만에 기업 총수들을 만나 공식 행사를 소화했다. ‘창조경제’를 표방한 박근혜 전 대통령은 처음부터 기업인들을 향해 경제위기 극복과 경제활성화를 위해 협조해달라고 요청했다. 박 전 대통령은 당선 일주일만에 재계 인사들을 만났다. 이 전 대통령보다 이틀 빠른 재계 스킨십 행보였다. 문재인 전 대통령과 총수들의 대면은 방미 순방길에서 이뤄졌다. 정식회동을 한 것은 취임식 후 두달하고 보름이 지난 뒤였다. 문 정부에서 전경련은 홀대 받았다. ‘전경련 패싱’ 단어가 등장한 것은 이때다.
이처럼 역대 정부에 따라 총수들과의 밀착 정도가 약간 차이가 있을 뿐, 경제살리기를 위한 투자 등 기업에 요청할 것이 있을때마다 청-재 회동이 꾸준히 진행돼 왔다는 것은 이 사례가 말해준다. 대통령 얼굴은 바뀌었고 재계도 이건희 회장에서 이재용 회장, 구본무 회장에서 구광모 회장, 김승연 회장에서 김동관 부회장, 조석래 회장에서 조현준 회장으로 세대교체만 됐을뿐 그 흐름은 여전하다.
이재용 인기, 하늘을 찔렀다고?
재미있는 건 대통령과의 부산행에서 이재용 회장이 생각지 못한 선물(?)을 챙겼다는 분석이 이어졌다는 점이다. 깡통시장 방문후 온라인 커뮤니티엔 ‘친구가 찍은 실시간 이재용 사진’이라는 제목의 게시물이 올려졌는데,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사진 속에서 이 회장은 ‘쉿’하는 포즈와 함께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나중에 “어묵 국물 좀…”이라며 국물을 더 청했다는 말이 더해지면서 재벌답지 않은 소탈한 모습에 네티즌들이 환호한 것이다. 사진 배경은 현장에 동행한 이영 중기부 장관을 통해 알려졌다. 그는 페이스북을 통해 “시장 전체가 대통령 연호 소리로 가득했지만, 그 사이를 뚫고 유독 이재용 회장을 부르는 상인들의 목소리가 간혹 들려왔다. 그렇게 가는 곳마다 사진 찍자, 악수하자고 하는 통에 아마도 주변에 대통령이 계셔서 소리 낮춰달라고 하신 포즈가 아닐까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회장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고 했다. 이에 정치권에서도 “(깡통시장)주인공은 윤 대통령이 아니라 이 회장이었던 것 같다. 이 회장이 대중들의 관심을 받았고 긍정적인 호감 이미지로 급상승했다”(허은아 의원)는 얘기가 나왔다.
암튼 깡통시장에서의 대통령과 그룹 총수들의 먹방 모습의 사진 한장, 이것이 여러갈래의 뒷말을 남겼다. “권력으로 대기업들 팔 비틀어 정치적 이익을 도모하는 모습”(이언주 전 의원·페이스북), “권력을 남용한 일종의 ‘슈퍼 갑질’”(김남국 무소속 의원·페이스북) 등 고강도 비판을 듣기 싫다고 귀 막지 말고 대통령실은 늦었지만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쌍팔년도가 아니다. 세상은 바뀌었고, 국민의 눈은 더욱 매서워졌다.
김영상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