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슈퍼리치팀 윤현종 기자ㆍ이채윤 학생기자] 수는 적으나 모두 ‘일당백(?)’이다. 바로 미국서 자수성가로 부(富)를 일궈낸 여성 부호다. 32세 젊은 여성부터 69세의 지긋한 나이의 여성까지. 직업도 실리콘밸리 최고경영자(CEO)부터 슈퍼모델 출신 기업가까지 가지각색이다. 자산을 모두 합치면 100억달러다. 우리 돈 11조 2250억원이다.
특징이 있다. 남성 부호들이 주로 IT 등 테크 산업서 부를 축적했다면, 여성은 ‘패션ㆍ리테일’분야에 강했다. 포브스가 지난 6월 선정한 대표 여성 기업가 9명 중 5명이 이를 증명했다. 그러나 저마다 같은 듯 다르다. 내 옷처럼 편한 기능성 속옷을 파는 사업부터 빅데이터를 분석해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쇼핑몰까지 각자의 차별점을 활용해 부를 일궜다.
가장 먼저 소개할 인물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90명에 이름을 올린 스팽스 CEO 사라 블레이클리다. 자산 10억달러를 쥔 블레이클리는 파티의상을 완벽하게 뒷받침해줄 속옷이 없어 팬티스타킹의 발목부분을 가위로 잘라 입곤 했다. 그것이 ‘스팽스’의 시작이었다. 그는 2000년 아르바이트를 하며 모은 5000달러를 몽땅 투자해 기능성 속옷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 후 2년여간 수백 번의 착용 테스트와 제품 개발에 힘을 쏟았다. “소비자가 불편하게 여기는 단 한 가지 사소한 일을 개선하기 위해 2년을 바친 적도 있다.”며 “사소한 것을 사소하게 여기지 마라”는 그의 말에서는 사업에 대한 자신감마저 있었다. 현재 스팽스는 캐나다ㆍ영국ㆍ호주ㆍ싱가포르 등 전 세계 30여개국에 진출하는 등 보정 속옷 부문에서 판매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블레이클리는 재산의 90%이상을 환원하겠다는 ‘더기빙플레지’에 가입한 첫 여성 억만장자이기도 하다. 2006년부터는 ‘사라 블레이클리 재단’을 설립해 여성 예비 창업가를 지원하고 있다.
20년 전 미국 스포츠 전문주간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SI)’표지에 비키니 차림으로 서있던 한 여성. 그는 연매출 20억달러 기업을 움직이는 경영인으로 변신했다. 캐시 아일랜드 월드와이즈 창업자 캐시 아일랜드(53)다. 자산 3억6000만달러로 집계된 캐시 아일랜드는 1984년부터 10년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수영복 차림의 사진이 표지를 장식할 만큼 촉망받는 모델이었다. 그러나 그의 꿈은 따로 있었다. 바로 성공한 기업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모델로 활동하던 1993년 디자인ㆍ마케팅 회사 ‘캐시 아일랜드 월드와이즈’를 설립했다. 자신의 이름을 내놓은만큼 자부심과 책임감도 컸다. 아일랜드는 직접 디자인한 양말을 팔아 인기를 얻자 점차 가구ㆍ보석ㆍ주방용품ㆍ사무용품 등으로 제품 영역을 확대했다. 현재는 이 기업의 최고경영자 겸 수석 디자이너다. 패션 관련 잡지ㆍ 서적들을 출판하는 페어차일드 퍼블리케이션은 아일랜드를 패션업계의 영향력 있는 50인 중 한 명으로 꼽고 있다.
2013년 ‘세계에서 가장 섹시한 CEO’ 1위 자리를 차지한 이도 있다. 글로벌 온라인 쇼핑몰 ‘내스티 갤’을 창업한 소피아 아모루소(자산 2억 8000만달러ㆍ32)다. 아모루소는 성공의 계단을 착실히 밟은 전형적인 CEO가 아니다. 그의 10대는 말 그대로 ‘루저’였다. 취미활동은 히치하이킹이었고, 생계수단은 도둑질이었으며, 특기는 쓰레기통 뒤져 음식 찾아내기였다.
그러다가 그는 전자상거래 플랫폼 이베이에 자신이 훔친 책부터 자기 옷까지 팔기 시작했다.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그렇게 아모루소는 2006년부터 본격적인 온라인 판매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초기 영업방식은 그다지 정상적이지 않았다. 동네에 죽은 사람의 옷을 사들여 이를 코디하고, 사진을 직접 찍어 올려 판매를 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이베이에서 큰 성공을 거뒀지만 판매 규정을 어겨 쫓겨났다.
그러자 아모루소는 직접 온라인 쇼핑몰 ‘내스티 갤’을 설립했다. 내스티 갤은 2008년 22만3000달러였던 매출액이 2011년 2300만달러까지 급증했다.
13세에 부모님과 미국으로 건너간 한인 1.5세도 아메리칸 드림을 이뤘다. 닉스 코스메틱을 설립한 토니 고(고미영ㆍ43)다. 자산 2억 6000만달러를 소유한 그는 25세가 되던 해 부모님께 25만달러를 빌려 중저가 화장품회사인 닉스 코스메틱을 창업했다. 그리고 이 회사를 15년간 경영하며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색조화장품회사로 성장시켰다.
창립첫해 연매출 400만달러였던 닉스는 2014년 로레알에 매각할 당시 연매출 1억 2000만달러였다. 로레알은 토니 고에게 연매출 4배가 넘는 5억달러를 매각대금으로 지불했다. 당시 닉스의 인스타그램 팔로워 숫자는 160만명. 로레알보다 300배 많은 수치였다.
2015년엔 또 다른 도전에 나섰다. 선글라스 회사 ‘퍼버스(Perverse Sunglasses)’를 창업했다. 그는 여전히 훌륭한 제품을 세련된 디자인으로 합리적인 가격에 파는, 닉스 사업 모델을 추구하고 있다.
인공지능(AI)과 패션 사업을 연결해낸 여성 부호도 있다. 스티치 픽스를 설립한 카탈리나 레이크(1억 2000만달러ㆍ33)다. 미국 온라인 쇼핑몰 스티치 픽스는 여느 쇼핑몰과는 다르다. 회원들의 취향과 신체 치수에 맞춰 의류와 액세서리를 배송ㆍ서비스 비용을 받는 시스템이다.
레이크는 쇼핑할 시간이 없거나 복잡한 페이지를 들여다보기 싫은 사람들을 타겟으로 삼았다. 이용자들이 온라인 스타일 프로필을 채워 넣기만 하면 상품이 배송되는 것이다. 고객의 취향ㆍ예산ㆍ생활방식에 맞게 배송되는 5가지 의상과 액세서리는 모두 2800여명의 ‘인간’ 스타일리스트와 ‘기계’ 스타일리스트의 합작이다. 고객은 마음에 드는 제품만 남기고 나머지는 돌려보내면 된다.
현재 스티치 픽스에는 수 백 가지 알고리즘이 있다. 고객에게 제품을 조합시키는 스타일링 알고리즘부터 스타일리스트와 고객의 조합ㆍ고객 서비스 만족도를 계산하는 알고리즘까지 있다. 회사가 얼마나 많은 수와 종류의 재고를 준비해야하는지 알아내는 알고리즘은 기본이다.
그러나 이 5명이 한국서 사업했다면 그들만의 ‘드림’을 이룰 수 있었을까. 작년 국세청이 낸 ‘국세통계로 본 여성의 경제활동’에 따르면 창업 1년 안에 폐업하는 여성 창업자는 전체 27.9%다. 3년 이상 기업을 유지하는 여성 기업가는 40%에 불과했다.
여성 창업 업체 10개 중 6개가 3년을 못 버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