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고 싫은 감정 억누르는 한국인 문화서 비롯 -고혈압ㆍ당뇨ㆍ간염처럼 꾸준히 치료 받아야 -우울증 치료 환자 100명 중 5명은 화병이 원인 -“적절한 말로 화를 조금씩 분출하며 풀어 내야”
[헤럴드경제=신상윤 기자] 주부 남모(57) 씨는 제19대 대통령 선거일이었던 지난 9일 밤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같은 날 오후 8시 TV를 통해 출구조사를 본 뒤 원하지 않던 결과가 현실로 다가오자 정신적 허탈감에 빠진 것이다. 밤늦게 걸려온 절친은 자신이 지지하던 후보의 당선소식을 기쁨에 찬 목소리로 알려온터라 남 씨의 허탈감은 더했다. 하지만 허탈감도 잠시. 시간이 지나자 자신과 정치적인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몰려왓던 상실감은 이내 공정하고 질서정연했던 투표결과와 자신이 지지했던 후보의 결과인정에 마음이 누그러졌다. 정신과 전문의들은 “물론 당장은 자신이 투표했던 후보가 당선이 안된 결과가 나오면 허탈한 감정이 들 수 있지만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방송 등을 통해 현실을 직시하다보면 마음이 누그러지면서 평정심을 자연스럽게 찾아온다”고 설명했다.
대선은 끝났지만 자신이 지지하던 후보에게 너무 정신적인 결속감을 보인 사람들은 우울증과 화병도 간혹 생길 수 있다. 특히 이번 대선처럼 현직 대통령이 스캔들로 낙마하고 임기를 못채운채 치뤄진 보궐선거로 국민들의 정치적인 견해는 양분됐고 그 어느때보다 국민들간에 갈등의 골이 깊어진채로 숨가뿐 몇 개월을 건너왔다. 어떤 사람은 환호에 찬 승리감을 느낄 것이고 반대편의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상실감과 허탈감에 빠질 것이다 .
전문가들은 “누구나 만족하는 결과라 있을 수 없다”며 “이번 대선 결과로 쌓인 스트레스를 주변 사람들과 적극적인 대화와 상대방을 이해할려는 배려심을 가지고 소통에 임한다면 충분히 극복가능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영어로도 ‘hwa-byung’…한국인만의 정신장애=화병은 만성적인 스트레스로 인해 생긴 화난 감정이나 분노를 상당 기간 적절히 처리하지 못해 불안이나 우울을 동반하는 불안정한 심적 상태를 말한다. ‘정신장애의 진단 및 통계편람(DSM)’ 제4판에서는 화병을 문화 관련 증후군으로 분류, ‘분노의 억압과 관련된 한국인의 토속적 정신장애’라고 정의했다. 1996년 미국 정신과협회도 화병의 영어 표기를 우리말 그대로 ‘hwa-byung’으로 하고 한국인에게만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으로 정의했다.
자신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편인 서구인과 달리 감정을 억압하는 편인 한국인은 좋고 싫은 것을 표현하지 않는 특유의 문화를 지속해 왔다. 이것이 한국인에게만 있는 특수한 정신질환인 화병을 유발하는 사회 문화적 배경을 마련했다. 선조들은 민요, 판소리, 광대놀이, 굿, 민간신앙 속에서 이런 울분과 분노들을 풀어내고자 했다. 하지만 화병이 고혈압, 당뇨병, 간염, 심장병처럼 치료를 받아야 하는 병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화병은 취업, 진로, 조기 실직, 정년퇴직, 경제적 어려움, 자녀 문제, 남편 또는 시부모와 관계처럼 스트레스를 상당 기간 지속시키는 상황에 의해 유발될 수 있다. 서국희 한림대 동탄성심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화병은 중년 이후 여성이나 기혼자에게 흔히 발견되며, 생활수준이 낮은 사회계층에서 많은 만성적 경과를 보이는 병”이라며 “정신의학적으로는 우울증, 신체화 장애, 불안장애 같은 정신장애가 겹쳐 나타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불안 동반하는 우울증…“4~6주 치료하면 회복”=화병이 발병하면 불안, 우울, 강박증 등 일반적인 신경증적 증상이 일어난다. 불면, 피로, 금방 죽을 것 같은 공포, 소화불량, 식욕부진, 위산과다, 전신 통증, 답답함, 열기(울화ㆍ번열), 입 마름, 치밀어 오름, 가슴 두근거림, 목이나 가슴에 덩어리가 뭉침, 한숨, 하소연, 뛰쳐나가고 싶음, 피해 의식, 건강염려증, 충동성 등이도 함께 나타난다. 이러한 증상이 2주 이상 동반된다면 화병을 의심하고 전문의를 찾아 진단을 받아보는 것이 좋다.
화병은 무작정 화를 내게 한다고 치유되지 않는다. 서 교수는 “화를 적절히 통제하지 못하면 화가 더 커지게 되고 폭력성까지 노출할 수 있다”며 “격한 행동으로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는 일이 없도록 적절한 말로 화를 조금씩 분출하며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화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막혔던 말문이 열리듯 가슴에 오랫동안 응어리져 쌓인 감정이 자신 속에서 용납되고 자신 속에서 화해가 이뤄져야 한다”며 “주변 사람도 화병 증상이 있는 상대를 자극하는 말이나 행동에 유의해야 한다. 시간을 갖고 차분히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좋다”고 덧붙였다.
정확히 조사되지 않았지만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를 받는 우울증 환자 100명 중 5명 정도가 화병이 원인이라고 전문의들은 전한다. 때문에 화병은 불안을 동반하는 우울증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신과 치료를 받지 않고 장기간 방치하면 만성적 상태에 이르러 쉽게 회복되지 않고 쉽게 재발돼 점점 치료가 어렵게 된다.
서 교수는 “화병에는 심리ㆍ약물치료의 병행 요법이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으로 인정되고 있다”며 “우울증이 주된 경우 대략 4~6주동안 심리ㆍ약물치료를 받으면 대부분 회복된다. 치료를 마친 환자는 한결같이 ‘내가 왜 여태까지 그런 고통 속에 살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고 했다.
대부분 화병 환자는 대부분 화병의 신체 증상으로 인해 해당 진료 과목을 찾아다니지만, 자신의 병이 스스로 표현하지 못한 울분과 분노와 연관된 것임을 어렴풋이 인식하고 있다. 이 울분과 분노를 적절하게 표현하게 해 억눌렸던 개인의 삶을 되찾게 해야 한다는 것이 대부부 전문의의 조언이다.
서 교수는 “화병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혼자 안고 고민하기보다 공감해 줄 수 있는 가족이나 지인과 소통하고 감정을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며 “운동이나 취미 생활을 통해 스트레스를 적절히 해소해 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충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