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훈 한국예탁결제원 사장

(경제광장)증권 전자화의 첫 걸음, 전자단기사채

[헤럴드경제=손수용 기자]필자가 프랑스와 미국에서 생활할 때다. 집을 구하고 나면 가장 먼저 간 곳이 조립식 가구점인 이케아(IKEA)로 기억한다. 전 세계 42개국에 350여개 매장을 보유한 이 글로벌 가구회사의 매력은 북유럽 스타일의 단순하고 감각적인 디자인과 저렴한 가격 등을 꼽을 수 있다. 이에 더해 소비자는 직접 조립하고 설치하는 DIY(Do It Yourself) 과정을 통해 자긍심과 성취감을 덤으로 얻게 된다. 하지만 공장에서 찍어낸 조립식 가구인 탓에 고급 가구가 주는 고급스러움이나 세월의 풍미는 포기해야만 한다.

사실 이케아의 진정한 혁신 아이콘은 납작한 포장박스인 ‘플랫팩(flat pack)’이다. 플랫팩은 식탁이 자동차 트렁크에 들어가지 않자 다리부분의 나사를 풀어 분리한 후 테이블과 함께 포장해 물류비를 절감하는 것으로, 지금 보면 매우 단순하고 당연한 얘기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할머니가 쓰던 고가의 가구를 손주에게까지 물려준다는 전통적인 개념에서 ‘저렴한 소비재로서의 가구’라는 혁신적인 패러다임 이동이 숨어 있다.

세계 자본시장에 있어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새로운 변화들은 모두 ‘증권의 전자화’라는 패러다임에 기초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 자본시장의 참가자들은 국경을 넘나드는 막힘없는 돈의 흐름과 안정적인 수익확보를 위해 믿을 수 있는 투자환경에 대한 기대수준을 점점 높여가고 있다. 이런 요구에 부합하는 것 중의 하나가 전자증권 또는 증권의 전자화이다. 이미 전 세계 70개국,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국 중 32개국이 부분적 또는 완전한 전자증권을 도입해 운영하고 있다. 증권시장의 하부구조 선진화와 효율성 제고를 통해 글로벌 기업과 투자자를 끌어들이고 자국의 금융 경쟁력을 키우려는 각국의 노력이 더해진 결과다.

우리나라도 지난해 최초의 전자증권인 전자단기사채를 도입했다. 전자단기사채는 종이 형태로 발행해 오던 기업어음 (CP)을 전자 형태로 바꾸는 것으로 올해에만 3백조원 이상 발행됐으며, 1년 만에 종전 기업어음의 발행규모를 넘어서고 있다. 그간 기업어음은 분실과 위변조 위험이 따라다니고 발행 및 유통 관련 정보가 제대로 공개되지 않는 등 소위 ‘깜깜이 발행’으로 단기금융시장의 불안요인으로 지적받아 왔다. 전자단기사채는 종이 형태의 증권발행에 투입되는 자본시장의 실물관리 비용을 획기적으로 절감시켜 줄 뿐만 아니라, 정확한 정보 제공으로 시장의 투명성을 제고해 투자자 보호와 지하경제 양성화에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자본시장에 몸 담고 있는 필자로서는 이러한 증권의 전자화가 하루 빨리 주식, 채권 등 증권시장 전반으로 확대되기를 희망한다. 모든 증권의 발행, 매매, 권리행사, 정보관리가 단일한 디지털 플랫폼에서 이뤄진다면 국내는 물론 글로벌 투자자에게 한국은 더욱 매력적인 자본시장으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 현재 증권의 전자화 관련 법안은 지난 3월 국회에서 발의됐으며, 정부도 입법을 준비중이어서 조만간 구체적인 논의가 진행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케아 직원이 식탁다리는 언제나 테이블에 붙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이케아는 지금과 같은 혁신 기업으로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다소 늦은 감이 없진 않지만 증권의 전자화라는 글로벌 자본시장의 혁신 대열에 합류했다. 우리나라 자본시장의 디지털 플랫폼은 전자증권의 구현으로 완성될 것이다. 우리 모두 조속히 이를 실현시켜 자본시장 혁신에 속도를 내야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