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서 32년 재직하며 ‘콘서트7080’ ‘위기탈출 넘버원’ 등 완성 경기대 예술대학원 ‘K컬처 융합학과’서 한류인재 키우는 전진국 교수 전진국 교수(60)는 예능 PD 출신의 콘텐츠 전문가다. 콘텐츠 전장(戰場)에서 살아남은 역전의 용사다. KBS에서 32년간 예능 콘텐츠를 기획, 제작하는 예능PD와 콘텐츠를 유통 판매하는 콘텐츠 비지니스 업무를 담당했다. 최근에는 대학으로 옮겨 콘텐츠 비지니스를 가르치고 있다. 그가 있는 곳은 한류 인재 양성으로 특화된 경기대 예술대학원 ‘K컬처 융합학과’다.
콘텐츠는 대한민국의 먹거리라고 한다. 콘텐츠가 권력이 되는 시대다. 이 이야기는 콘텐츠를 모르는 사람도 자주 듣는 얘기다. 하지만 막상 어떻게 하면 콘텐츠가 되는지에 대해 말해보라고 하면 쉽게 답하기가 힘들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전진국 교수의 이력과 활약상을 살펴보는 것만으로 어느 정도 해결된다.
전 교수는 85년 4월부터 2017년 7월까지 32년 3개월간 KBS에서 일했다. KBS에서 예능 PD 출신으로 처음으로 부사장까지 올랐다. MBC에서는 신종인 PD, SBS는 이남기 PD가 그런 케이스다.
전 교수는 신입 PD 시절 유명한 버라이어티 쇼 연출가인 고(故) 진필홍 PD 밑에서 조연출로 ‘100분쇼’ ‘젊음의 행진’ ‘가요톱텐’ 등 주로 음악 프로그램을 담당했다. 5년차때인 1989년 미국으로 2년간 연수를 떠났다. 평생 예능물을 연출하려면 공부를 한 후에 연출하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국내에는 관련 서적도 별로 없었다.
“그전부터 유학을 가고 싶었는데 회사에서 허락을 해주지 않았다. 88년에 노조가 생겨 자비 연수가 가능해졌다. 내가 다녔던 캘리포니아 주립대(Northridge)는 SM 이수만 프로듀서가 공부했던 곳이기도 하다. 새로운 것들을 접하고 익힐 수 있던 시절이었다.”
▶예능프로그램 개발. 새로운 것과의 접목=전 교수는 미국에서 외국 음악잡지, 음악과 예능 프로그램 등을 보고 익혔다. 돌아와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고싶었다. 93년 선보인 ‘지구촌 영상음악’은 그 결실중 하나다.
“미국서 음악 프로그램과 뮤직비디오를 많이 보고 접목한 ‘지구촌 영상음악’은 나름 신선했다. 이 분위기를 타고 자회사인 KBS 미디어에서는 외국 음악을 소개하는 잡지인 글로벌 뮤직비디오(GMV)를 무려 5년간이나 제작하기도 했다.”
전 교수는 음악 예능 장르에서 코미디와 국악을 빼면 다 해봤다. 그가 ‘가요톱텐’을 연출할 때는 시청률이 18%나 나왔다. 룰라와 투투가 1~2위를 두고 각축하는 시절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가요톱텐은 생방송이었다. 크레인을 사람이 타고 연출할 때다. ‘포플러 나무 아래’를 부르던 가수 이예린이 갑자기 사라졌다. 크레인 끝에 머리를 부딪쳐 팽개치듯 넘어져버렸다. 그런데도 생방송을 의식해서인지 벌떡 일어나 노래를 불렀다. 아찔 했던 순간이었다.”
90년대 중반 들면서 예능은 음악에서 버라이어티 예능으로 넘어갔다. 이때 전 교수는 CP로 참가했다. 그가 책임PD로 있던 ‘토요대행진’은 ‘떴다 이홍렬’ 등 몇몇 코너를 성공시켰다.
교회에 다니는 전 교수는 목사로부터 아이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달라는 얘기에 귀가 솔깃했다. 공영방송 PD인 전 교수 자신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연출한 ‘가요톱텐’에도 미아찾기 캠페인을 넣어 노래하는 중 아이를 찾기도 했던 터였다.
특히 노래를 통한 순기능에 대한 목마름이 컸다. 그런 고민끝에 나오게 된 프로그램이 노래를 통한 기부 콘셉트인 ‘사랑의 리퀘스트’다. 이 프로그램은 96년 전진국 PD가 아이디어를 냈지만 채택되지 않았고, 97년 후배 최공섭 PD의 아이디어로 채택되면서 전진국 PD가 연출을 맡게됐다. 97년 10월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18년동안 방송되며 무려 860억원 정도를 모금했다. 목사의 조언과 생각을 받아들인 것이 커다란 콘텐츠 가치로 발전된 사례이기도 하다.
“시작하자 마자 IMF가 터져 시기가 잘못된 줄 알았다. 하지만 오히려 평상시보다 더 많은 콜(call)이 들어왔다. 생방이 끝날 때쯤 1만2천여콜이 들어오기도 했다. 전화를 이용한다는 게 편리했다. 어려울수록 한국인은 정에 약하고 이웃에 대한 사랑을 더 많이 느낀다는 걸 실감했다. 지금은 KBS를 나왔지만 언젠가 가회가 주어지면 새로운 버전의 도네이션 프로그램, 1인 미디어, 멀티 플랫폼 시대에 담을만한 형태를 개발하고 싶다.”
▶KBS의 공익형 예능 프로그램 윤곽을 완성시키다=정연주 사장 부임후 KBS 예능이 1팀과 2팀으로 분리된 2004년 전 교수는 예능 2팀장을 맡았다. ‘슈퍼선데이’ 등 굵직한 프로그램은 대부분 1팀에 있었다. 그래서 소속 PD들에게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어 히트시키자고 호소했다.
“그때 PD들에게 밀어부쳐 유찬욱 PD가 아이디어를 낸 ‘콘서트 7080’, 이세희 PD가 안을 만들어 발전시킨 ‘상상플러스‘가 나왔다. ‘위기탈출 넘버원’은 제작비가 부족해 보험협회에 사정해 제작비 지원을 받아 만들었다. 6개월만 해보자며 제작했는데 기대 이상의 반응이 나왔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됐고, 만화와 책으로도 많이 팔렸다. 이렇게 해서 기존의 ‘스펀지’를 포함해 ‘상상플러스’ ‘위기탈출 넘버원’ ‘사랑의 리퀘스트’ 등 공익예능 전성기를 맞았다.”
전 교수는 창원총국장 시절 지방에서 2년을 보냈다. 그는 로컬 PD로 안주하지 말라고 후배 PD들에게 조언하며 새로운 프로그램 만들기를 종용했다. 이 때 전 교수는 PD연합회 상과 방송대상, 해외방송상 수상이라는 세 가지 목표를 세웠다. 그 결과 소소한 문제에 대해 화끈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박덕선 PD의 지역버라이어티 ‘소화제’가 2008년 피디연합회 상을 수상했고, 다큐멘터리 한국방송대상과 ABU(아시아 태평양 방송 연합)가 주는 상을 받는 프로그램도 후배 PD들에 의해 제작됐다.
그는 그런 성과와 공로로 2010년 예능국장에 기용됐다. 팀제 시절 예능 2팀장을 포함하면 5년반을 예능국장을 해 최장수 예능국장이라는 타이틀이 생겼다.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그는 예능국장이 돼서도 가만 있지 않았다. 서바이벌과 오디션을 트렌드로 하는 예능을 만들라고 독려했다.
“서바이벌 음악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는데 MBC에서 ‘나는 가수다’가 먼저 나왔다. 우리에게는 충격이었다. 준비한 포맷을 바꿔야 했다. ‘나가수’는 가창력, 중견가수 위주인 반면 ‘불후의 명곡’은 K팝 주역들 중심이었다. 젊은 가수들이 나와 과거 주옥같은 히트곡을 재편곡해서 불러 원조를 되짚어보는 프로그램이었다. 경쟁 형태이긴 했지만 ‘나가수’처럼 잔혹한 경쟁은 아니었다. ‘불후의 명곡’은 후발주자라 처음에는 욕도 먹었지만, 점차 차별화를 시도해나갔다. 마침 초반에 효린과 알리가 크게 활약해 프로그램을 띄웠다.”
전 교수는 이 시절 K팝 주역들의 활약상을 보며 ‘뮤직뱅크 월드투어’를 구상했다. 2011년 7월 도쿄에서 시작했다. 도쿄돔 공연은 유료관객만 4만5천명이 왔다. TV아사이 사장이 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 후에도 전 교수는 파리, 베트남, 홍콩, 칠레 등 6차례나 예능국장으로 현장을 지휘했다. 현지에서 ‘뮤직뱅크 월드투어’는 공연을 넘어 다양한 문화 콘텐츠와의 연계가 가능한 모델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류 대표적 브랜드이기도 한 ‘뮤직뱅크 월드투어’는 이후에도 매년 2차례 정도를 해외에서 열고 있다.
▶콘텐츠로 세상을 지배하라=전 교수가 탄탄대로만 달려온 건 아니다. 시련이 있었다. 예능국장 시절인 2011년 종합편성채널이 생기자 PD들이 들썩거렸다. 인간적으로 설득도 하고 호소를 해도 쉽지 않았다. 김석현 이명한 신원호 김석윤 김시규 조승욱 윤현준 나영석 PD 등이 회사를 나갔다. 나영석 PD는 끝까지 붙잡아 1년 늦게 나갔지만 설득으로 붙잡는 건 한계가 있었다. 예능 PD 80여명중 무려 15명이 떠났다. 떠나간 PD들은 일을 잘하는 예능 주축이었다.
전 교수는 이 때가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회고했다. 전 교수는 허리 부분이 대거 빠져버려 전력이 크게 약화된 KBS 예능국을 이끌어나가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그속에서도 뚝심과 노력으로 잘 버텨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전 교수는 예능국장 시절 잘 알고 지내던 스타일리스트 윤혜미 씨에게 책을 한 권 받았다. 스타일리스트를 하면서 겪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이 쓴 책 ‘남자의 멋 품격’이었다. 이를 보고 신선한 자극을 받았다.
“30년 가까이 연출한 사람이 책 한 권 없다는 게 말이 안됐다. 퇴근해서 1년여간 책을 썼다. 쓰면서 스스로 정리가 많이 됐다. 내가 경험했던 일들에 대해 체계적으로 논리가 잡히고, 뭘해야 할지도 분명해졌다.”
그가 2013년 쓴 책 ‘콘텐츠로 세상을 지배하라’(쌤앤파커스)에는 창의적 활동을 다섯 단계로 구분했다. 첫째 트랙은 생각의 모든 과정을 담는 ‘경험화’, 두번째는 경험과 생각이 아이디어로 발전하는 ‘체계화’, 세번 째는 책상을 벗어나 현장에서 실행하는 ‘제작화’, 네번 째는 재조합하고 구성하는 ‘편집화’, 다섯번 째는 가치를 확장하고 추가 보완하는 ‘진화화’다.
전진국 교수는 어릴 때부터 음악을 좋아해 대학에서도 4중창단으로 활동하고 교회에서도 성가대 활동을 하고 있다. 음악 PD와 예능 PD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생겼다. 그에게 콘텐츠를 계속 기획제작하는 이유를 들어봤다.
“연출할 때 새로운 기술을 접목하면 좋을 때가 있다. 2000년 창사특집으로 ‘인터넷 열린음악회’를 할 때다. KT의 협조를 받아 전국 40개 가정에 광케이블을 깔고 소형 카메라를 설치해 프로그램 도중 40개 가정의 모습을 보고 인터뷰도 할 수 있었다. 일본과 미국으로도 연결했다. 지금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인터넷 초창기라 새로웠다. 여기에 내가 컨텐츠를 만드는 이유가 있다. 프로그램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재미가 첫번째다. 또 하나 이유는 나의 위치에서 선한 영향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데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싶은 거다.”
서병기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