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 동맹관계 깨진 긴박한 동북아…미·일·중·러 4강 각자도생 세력구도 전문가 “남북관계 개선 추진” 조언…외교력 키워 강대국 균형추 역할을
갑오년은 한반도 근현대사에서 유난히 아픈 상처를 많이 남긴 해로 기억되고 있다.
120년 전인 1894년은 한반도 식민지의 시발점이 된 청일전쟁과 동학농민운동이 있었던 해이며, 60년 전인 1954년은 한국전쟁 종전 이듬해로 4사5입 개헌파동 등 극심한 정치·사회혼란으로 점철됐던 해이다.
청마(靑馬)의 해인 2014년 역시 세월호 참사 등 잇단 대형사고로 인해 또 하나의 가슴 아픈 갑오년으로 이미 자리하고 있다. 격동의 세월을 헤쳐 온 한반도 근현대사에서 어느 한 해 순탄한 해는 없었지만, 올해 갑오년이 한층 더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120년 전과 비견될 만큼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120년 만에 돌아온 질서변화=우선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시아 질서 변화가 숨 가쁘게 펼쳐지고 있다.
120년 전 청일전쟁은 기존 강대국 중국(淸)과 신흥 강대국 일본간의 전쟁으로, 동북아시아 패권을 둘러싼 건곤일척의 승부였다. 청일전쟁 결과 중국은 종이호랑이 신세로 열강의 반식민지로 전락했으며, 일본은 후발 자본주의국가에서 제국주의국가의 대열에 합류하는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이후 120년간 이어진 중국과 일본의 역학관계는 최근 들어 다시 한번 들썩이고 있다. 중국은 급성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정치·군사적 영향력 확대까지 도모하고 있으며, 일본은 미국을 배후로 기존의 기득권을 지키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중국과 일본의 갈등, 그리고 중국의 방공식별구역 선포와 일본의 집단자위권 추진은 이러한 배경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전통적인 역내 동맹관계도 흔들리면서 동북아시아 정세를 한층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한·미·일을 한축으로 하고 북·중·러를 또 다른 한축으로 하는 남·북방 삼각동맹은 그동안 전형적인 세력구도로 인식됐지만 최근 들어서는 근간부터 흔들리고 있는 모양새다.
김근식 경남대 교수는 최근 발표한 글에서 “동북아 정세가 혼란스럽다. 뚜렷하게 일정한 방향으로 정세흐름이 정리되지 못하고 있다”며 “각국이 개별적으로 국가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이른바 각자도생의 형국”이라고 진단했다.
열강이 으르렁대는 상황에서 청일전쟁·러일전쟁의 전쟁터가 된 끝에 식민지로 전락한 상처를 안고 있는 한반도로서는 끓는 가마솥과 다름없는 주변정세가 달가울 수 없다. 김 교수는 “각자도생의 동북아정세에서 한국의 곤혹스러움이 가장 크다”며 “남북관계는 이미 회생불가능으로 보이고 한일관계는 돌이키기 힘든 상황이 되었으며, 상대적으로 낫다는 한중관계나 한미관계도 겉만 번지르르할 뿐 속을 들여다보면 실속이 별로 없다”고 지적했다.
▶“남북관계 진전 바탕으로 힘의 충돌 통제해야”=물론 한국의 위상은 120년 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경제력이나 군사력 측면에서 한국은 세계 10위권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한류로 대변되는 문화 역시 동북아시아를 넘어 지구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 어느 하나 만만한 나라가 없다는 것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4강인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는 곧 전 세계 4강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다. 대한제국의 고종황제는 훨씬 더 열악한 상황에서 영세중립국 선포를 추진하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는 등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전문가들은 불안정성이 고조되고 있는 동북아 정세 속에서 남북관계 진전을 바탕으로 우리와 입지가 비슷한 국가들과의 협력을 통해 강대국간 힘의 충돌을 통제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장희 한국외대 교수는 “한국 입장에서는 남북관계가 악화된 상황에서는 미국이든 중국이든 외교력을 발휘하는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며 “선비핵화만 고집할 게 아니라 남북관계개선과 동북아평화협력, 그리고 핵문제 진전을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북미 공동코뮤니케 발표의 밑거름이 되고 2005년 정동영 통일부장관의 방북이 9·19 공동성명의 산파 역할이 됐듯이 남북관계가 진전돼야 한국의 외교입지가 넓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재현 아산정책연구원 아세안대양주 연구센터장은 인도네시아, 베트남, 싱가포르, 뉴질랜드 등 한국과 입지가 비슷한 국가들과의 협력을 강조했다. 이 센터장은 “미국과 중국의 큰 싸움에 끼어서 누구를 믿고 어디로 가야할까 고민에 빠진 나라는 한국만이 아니다”며 “전략적으로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국가들과 전략대화 등을 통해 솔직하게 얘기를 나누고 강대국들로 하여금 어떻게 바꿀 것인가 함께 방안을 도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강대국들이 모두 참여하고 있는 아태경제협력체(APEC)나 아세안안보포럼(ARF) 등과 같은 다자틀에서 국가 단위가 아닌 일반 개개인의 안전과 평화, 번영, 복지라는 근본가치를 공동으로 제기할 필요가 있다”면서 “강대국들도 반대할 명분이 없고, 강대국간 대결을 축소하고 협력을 확대하라는 식의 촉구도 가능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