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해전과 청산리 전투, 안중근 의사의 거사는 모두 우리 국민에게 일본의 침략이나 압제에 저항해 이뤄낸 승리의 기억이다.
임진왜란을 일으켜 파죽지세로 조선 전역을 유린하던 일본군에게 결정적 ‘한 방’을 날린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 이야기에 국민들은 가슴을 쓸어내린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모두들 ‘이순신 장군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 지금의 우리나라는 없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한 번쯤 해봤을 것이다.
청산리 전투는 어쩌면 임진왜란보다 더 큰 국난이라 할 수 있는 경술국치(1910년)로 조선이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가운데 이 땅의 민초들이 분연히 일어나 의병으로서 일본 정규군과 싸워 대승을 거둔 전투다. 국권 상실 직전인 1909년 중국 하얼빈역에서 일어난 안중근 의사의 거사가 우리 국민에게 준 울림도 컸다.
하지만 이러한 영웅적 저항 뒤 일본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때로는 우리가 얻은 것 이상으로 우리는 일본에게 뼈아픈 보복을 당했다.
명량해전 뒤 왜군은 전남 영광, 무안, 해남 등 남부지역 여러 마을들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충남 아산의 이순신 본가도 이 때 쑥대밭이 됐다. 왜군에 맞서 본가를 지키던 이순신의 셋째 아들 면(당시 21살)이 목숨을 잃은 것도 이 때였다. 뒤늦게 면의 사망 소식을 전해들은 충무공은 목놓아 통곡한 뒤 코피를 한 되나 흘렸다고 한다. 강항의 ‘간양록’에 따르면 당시 전남 무안의 왜선에 승선한 인원 과반수가 조선인이었고, 주변에 쌓인 시체가 산을 이뤘으며,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청산리 전투 이후에는 간도와 연해주 일대에서 일본군의 토벌작전이 시작돼 참혹한 간도학살사건(경신참변)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일본군은 3~4개월 동안 조선인 마을을 포위해 악랄한 학살극을 벌였다. 민가를 불태우고 가축을 약탈한 뒤 마을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집계된 조선인 희생자만 3400여명에 달한다.
안중근 의사의 거사 이후에는 안 의사 유족들이 탄압과 감시 속에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또한 일본은 안 의사의 거사 다음 해에 보란 듯 조선의 국권을 침탈했다.
오는 14일까지 제주에서 해군 관함식이 열린다.
관함식 참가가 예정된 일본 해상자위대 함정이 부대기인 욱일기를 게양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2차 세계대전 때 전범기를 국가적 행사에 용인할 수 없다’는 국민적 분노가 끓어올랐다. 우리 정부가 일본 측에 욱일기 게양 자제를 요청하고, 유사시 좌승함을 독도함으로 변경할 가능성까지 거론되자 일본 자위대가 스스로 불참을 결정했다.
국민들 다수는 우리 정부의 당당한 대응에 박수를 보내며, 일본의 국제관함식 불참을 또 하나의 ‘승리’로 뇌리에 새기는 중이다. 하지만 역사는 ‘자축하기는 이르다’고 조언한다. 승리 이후가 더 중요한 이유다.
마침 동북아 정세는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향해 서서히 나아가고 있다. 국가간의 감정 싸움이 어느 한 쪽의 영원한 승리로 끝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오히려 불거진 갈등을 어떻게 봉합할 것인지 지혜가 절실히 요구되는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