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길 ‘화성 반도체 공장’

생전 기공식 등 챙기며 애착

“이건희만한 ‘승어부’ 못봤다”

50년지기 김필규회장 추모사

이건희 회장 ‘반도체 심장’ 수원에 잠들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발인이 엄수된 28일 경기 수원시에 위치한 가족 선영으로 이 회장의 영정이 도착하고 있다. [연합]

변방의 한국을 세계의 중심에 올려 놓은 시대의 혁신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8일 영면(永眠)에 든다. 평소 “반도체에 미쳐 있다”던 그의 열정을 간직한 채, 고인은 한국의 반도체 신화의 본산인 수원에 잠든다.

개발도상국의 골목대장이었던 삼성을 세계의 거인으로 키워낸 이 회장의 업적을 기리는 추모 열기 속에 이 회장을 떠나 보내는 길의 동반자는 반도체였다. ▶관련기사 4·5면

비공개로 간소하게 치러진 영결식을 거쳐, 유족, 친지 등을 태운 운구 행렬은 용산구 한남동 자택과 이태원동 승지원(承志園), 리움미술관 등을 들른 뒤 화성 반도체 공장으로 향했다. 이 회장의 마지막 출근길이다. 이 회장은 삼성 반도체의 오늘과 내일을 그리는 반도체 공장의 모습을 유족들과 마지막으로 함께했다.

화성·기흥 사업장은 이 회장이 1984년 기흥 삼성반도체통신 VLSI공장 준공식을 시작으로 네 번의 행사에 참석할 정도로 애착이 깊던 곳이다. 특히 화성사업장은 이 회장이 생전 마지막으로 기공식과 웨이퍼 출하식을 챙겼던 곳이기도 하다. 이 회장이 2010년 화성사업장의 16라인 메모리 반도체 기공식에 참석해 직접 삽을 뜨는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게 널리 회자된다.

또한 이 회장이 기반을 다진 이곳을 기반으로 삼성은 반도체의 미래를 그리고 있다. 이곳에는 최첨단 공정인 극자외선(EUV) 장비가 들어간 V1 라인이 위치해 있다.

이건희 회장 ‘반도체 심장’ 수원에 잠들다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발인식이 28일 오전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된 가운데 유가족과 관계자들이 고인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연합]

화성을 거친 이 회장과 유족들의 종착지는 수원이다. 당초 거론되던 이병철 선대 회장과 모친 박두을 여사가 묻혀 있는 에버랜드 인근 용인 선영 대신 유족은 수원을 장지로 택했다. 한국의 반도체 신화를 일군 심장의 상징성, 반도체에 대한 고인의 평소 애착 등을 감안한 결정이다.

수원은 삼성전자의 고향이다. 1969년 수원에서 가전사업으로 출발한 삼성전자는 이 회장이 1974년 12월 6일 사재를 털어 자금난에 허덕이던 한국 반도체의 지분 50%을 인수하며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었다. 수원을 시작으로 이 회장의 과감한 투자 결정 속에 삼성전자는 용인과 화성, 평택으로 반도체 공장을 증설하며 세계 시장을 평정해 나갔다.

수원에는 세계 1위를 향한 그의 집념 또한 녹아 있다. 1995년 수원공장을 방문한 이 회장은 2000여명의 임직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불량 휴대전화기와 무선전화기 150억원 어치를 불 태우며, 휴대폰 세계 1위 신화의 초석을 다졌다.

인재와 품질의 중요성을 외쳤던 이 회장은 부친이었던 선대 이병철 회장을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는다 고인의 서울사대부고 동창이자 50년 지기인 김필규 회장은 이날 추모사에서 “승어부(勝於父)라는 말이 있다. 아버지를 능가한다는 말로, 이것이야말로 효도의 첫걸음이”이라며 “나는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지만 이건희 회장보다 ‘승어부’한 인물을 본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이같은 반도체와 휴대폰의 세계 시장 평정 신화를 달성한 삼성의 상징성 탓에 수원시의 명칭 자체가 사라질 뻔하기도 했다. 수원시장을 재선했던 김용서 전 시장은 2014년 3선에 도전할 당시 수원시 명칭을 ‘삼성시’로 바꾸는 공약을 내걸어 주목을 받았다.

제조라인이 대부분 이전한 삼성전자의 수원사업장은 현재 삼성의 두뇌로 거듭나 있다. 연구개발(R&D) 인력이 집중된 수원에서 삼성은 또 다른 기술 신화를 써 나가고 있다.

이건희 회장 ‘반도체 심장’ 수원에 잠들다
28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선산에 마련된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 장지에서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왼쪽부터), 이부진 호텔신라 대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이 장지로 이동하고 있다. [연합]

이 회장은 영면에 들지만 그의 치열했던 도전정신과 함께 삼성전자의 반도체 라인은 지금도 숨가쁘게 돌아간다. 29일 삼성전자는 3분기 확정실적을 발표한다. 작은 가전 회사 였던 삼성전자의 분기 영업이익은 12조원을 넘어섰다. ‘반도체를 할 수 없는 다섯 가지 이유’의 조롱 섞인 보고서를 뛰어넘은 그의 도전 정신은 지금 현재도 생생하게 심금을 울리며 삼성의 또 다른 미래를 자극한다.

김 회장은 “부친의 어깨 너머로 배운 이건희 회장이 부친을 능가하는 업적을 이루었듯이 이 회장의 어깨 너머로 배운 이재용 부회장은 새로운 역사를 쓰며 삼성을 더욱 탄탄하게 키워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정순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