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호 부회장 영국 기업 ARM 공동인수 추진 계획 밝혀
ARM 시스템 반도체 기반 설계 관련 기업…막강한 영향력
세계 각국의 반대 등 암초…단독 인수 아닌 공동 인수전략 필요
전문가들 “장기적 관점에서 메모리 사업과 시너지 등 기대”
[헤럴드경제=김지헌 기자] “바둑으로 치면 50수 앞을 내다보고 인생 최대의 베팅을 했다.”
지난 2016년 소프트뱅크가 320억 달러(약38조원)를 들여 ARM을 인수할 때,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발언이다. 당시 ARM 지분 75%는 소프트뱅크가, 25%는 자회사 비전펀드가 인수했다.
이런 ARM에 박정호 SK하이닉스 대표이사 부회장이 인수 의사를 표시하며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달 30일 SK하이닉스 이천 본사에서 주주총회 이후 헤럴드경제와 만난 박 부회장은 ARM 인수 여부를 묻는 질문에 “ARM 인수를 다른 기업과 공동으로 투자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단순 매입 의사를 넘어 실제로 다른 기업과 공동으로 인수를 추진하고 있다고 밝힌 첫 발언이다.
지난달 31일 한국거래소의 ARM 공동인수 검토에 대한 조회공시에 대해 SK하이닉스 역시 “사업 경쟁력 강화와 기업가치 제고를 위해 ARM 공동인수 등 다양한 전략적 방안을 지속적으로 검토 중”이라며 박 부회장의 발언을 부정하지 않았다.
누리꾼들도 이같은 소식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인수 추진이 알려지면서 “ARM을 사려 한다니 충격적이다”, “실제로 인수할 경우를 생각하면 설렌다”, “정말 인수가 가능할까”등의 반응을 내놨다.
설계 시장 강자 ARM…'공동 인수 전략'이 현실적인 방법
영국 기업인 ARM은 스마트폰의 두뇌에 해당하는 프로세서(AP)에 들어가는 핵심 기술을 보유한 설계 업체다. 반도체 칩을 설계하는 회사들이 작업할 때 필요한 기반 설계 구조와 요소를 제공해 수익을 낸다. 기존 컴퓨터의 중앙처리장치(CPU)의 설계 기반에 인텔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ARM은 애플 아이폰과 삼성전자 갤럭시 등 주요 스마트폰 AP 설계 시장의 95%를 지배하고 있다. 최근에는 애플 노트북을 시작으로 PC 시장에도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추세다. 향후 자율주행차에 쓰일 시스템반도체 수요를 감안할 때 ARM의 설계 기반 영향력은 더 막강해질 수 있단 분석이 나온다.
SK하이닉스의 ARM 인수는 실제로 가능한 것일까. 업계에서 일단 우려하는 것은 ARM에 대한 인수가 이미 한 차례 무산된 바 있다는 것이다. 미국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는 지난 2월 초 미국, 영국, 유럽연합(EU) 규제 당국의 저항을 버티지 못하고 ARM에 대한 인수를 포기했다. ARM이 여러 국가 반도체 기업에 설계기반을 제공하다보니, 특정 기업에게 인수될 경우 산업계 전체가 난색을 표할 수 있단 지적이다. 외신 등에 따르면 일론 머스크 테슬라의 최고경영자(CEO) 역시 엔비디아의 인수에 반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선 ARM이 마치 국제정치에서 스위스처럼 ‘중립국’ 지위로 남아야 한다는 요구가 이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이같은 이유에서 박 부회장 역시 단독 인수가 아닌 공동 인수 전략을 택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는 “ARM은 굉장히 중요한 회사인데 특정한 누군가가 그 이익을 다 누리면 ARM을 인수하도록 (반도체) 생태계에서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지분을 공동으로 인수하는 방안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며 “전략적 투자자들과 논의를 해나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외신에 따르면 시장조사기관 가트너 소속 한 연구원은 “ARM이 다른 반도체기업에 인수되는 것은 앞으로도 계속 문제가 될 수 있다”며 “(이런 이유로) SK하이닉스도 컨소시엄을 구성하게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당장 규제당국과 글로벌 기업들의 반대를 뚫고 나갈 대안을 찾는 게 급선무란 분석이다.
이에 따라 SK하이닉스와 손잡을 수 있는 기업들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인텔의 경우 팻 겔싱어 최고경영자(CEO)가 지난 2월 중순 열린 ‘인베스터(투자자) 데이’ 대상 행사에서 “컨소시엄이 나온다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참여하는 것이 매우 유리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일각에선 삼성전자의 인수 컨소시엄 참여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인수합병(M&A) 계획을 공식화한 삼성전자가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1위에 오른다는 목표를 담은 ‘시스템반도체 비전 2030’을 실행하기 위해서라도 전략적으로 ARM의 지분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SK하이닉스와 장기적인 관점에서 산업적 시너지 기대
일각에선 SK하이닉스가 설령 인수하더라도 시너지가 날지에 대한 의구심을 제기하는 의견도 나온다. SK하이닉스는 D램이나 낸드 위주의 메모리 반도체 제조기업이지만, ARM의 설계 사업은 비메모리 반도체 사업과 연관성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다만 전날 박 부회장은 SK하이닉스의 출범 10주년 행사에서 “메모리 사업 틀로는 기업가치를 높이는 데 제약이 있다”며 “솔루션 프로바이더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에 전문가들은 SK하이닉스의 사업 분야를 생각할 때 장기적 관점에서 이점이 있을 수 있다고 평가한다. 이종호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장은 “SK의 내부적인 논의 사항을 모르다보니 확실하게 얘기할 순 없다”며 “다만 인텔 낸드 사업부 1단계 인수와 관련해 생각할 때, 시스템적으로 인텔이 잘 해온 부분이 있기에 낸드 칩의 활용도를 높이는 솔루션 강화 등 차원에서 인수 시너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고 내다봤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예를 들어 메모리 내부에 연산 작업에 필요한 AI 프로세서 기능을 더한 지능형 반도체 PIM같이) 최근에는 메모리 반도체 기능에 시스템반도체적 특징을 담은 반도체를 만들려는 시도를 SK하이닉스가 하고 있기에 이런 기능 구현에 ARM 인수가 도움될 수 있다”며 “SK하이닉스가 (SK하이닉스시스템IC나 키파운드리 등 계열사를 통해) 파운드리 사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ARM에 대한 일부 지분만 보유해도 차후 파운드리 사업시 고객사 등에 대한 협상력을 높일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최도연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재무적 여건만 두고 볼 때, SK하이닉스 단독 인수였으면 자금 여력상 쉽지 않을 수 있지만 공동 인수 형식이면 지분율과 인수 시점 등에 따라 인수가 가능할 수 있다”며 “산업적 관점에서 생각해도 어쨌든 ARM 지분을 일부 인수하면 시스템 반도체 최전방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유리한 데다, 4차산업시대에 메모리의 데이터 트래픽이 급증하며 생길 수 있는 병목 현상에 대한 성능 개선에 도움받을 수도 있겠다”고 관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