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간적 제약 없어 더 큰 상처

친구 이름 옆에 ‘잡뒤’ 붙여 공포감

앱통해 피해자에 음식 대량 배달도

물리적으로 벗어나도 해결안돼

가해자들만 공유 ‘증거수집’ 한계

학교, 피해사례 적극적 수집 필요

정부 대책 말뿐 아직 성과 없어

#1. ‘잡뒤’. 무심코 페이스북에 들어간 중학생 A씨는 동급생이 올린 게시글에서 자신의 이름 옆에 이 말이 붙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잡히면 뒤진다’는 뜻으로, 어디서든 A씨를 발견하면 때리거나 괴롭혀도 된다는 일종의 공표다. 한동안 A씨는 학교에서도 길거리에서도 누가 자신을 발견할지 몰라 불안에 시달려야 했다.

#2. 중학교 1학년 B씨는 친구로부터 유튜브에 자신의 얼굴이 담긴 동영상이 올라왔다는 뜬금없는 이야기를 들었다. 평소 B씨를 괴롭혀왔던 친구들이 B씨 몰래 촬영한 것이다. 이들은 단체대화방 등을 통해서도 영상 링크를 수차례 유포했다.

학교 내 ‘사이버 폭력’이 나날이 진화하고 있다. 사이버 폭력은 디지털 기기에 익숙한 청소년들이 그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 채 손쉽게 저지르는 데다, 시·공간의 제약이 없어 피해자가 더욱 큰 상흔을 입는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27일 헤럴드경제가 만난 학교폭력 관련 전문가들은 청소년들 사이에서 사이버 폭력이 급증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학교폭력 예방 전문기관 푸른나무재단이 최근 진행한 실태조사에선 사이버폭력을 당해봤다는 응답 비중이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푸른나무재단이 지난해 12월부터 약 2개월 동안 청소년 6004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선 ‘사이버폭력을 당했다’고 한 비율이 31.6%로 나타났다. 언어폭력(19.2%), 따돌림(11.9%) 등에 비해 크게 높다.

재단은 학생들이 코로나19 시기 비대면 촉진 등으로 디지털 환경에 친숙해진 결과로 분석했다. 재단이 공개한 상담 사례들을 보면, 배달 앱으로 피해자 집에 음식을 대량으로 보내거나, 중고거래 앱으로 가짜 명품을 강매하는 등 디지털 기기를 이용한 유형들이 두드러졌다.

전문가들은 물리적 제약이 없는 사이버폭력의 특성상 피해자들의 고통도 더욱 클 수밖에 없다고 우려한다. 학교폭력을 연구한 이원상 조선대 법학과 교수는 “물리적 거리를 둬도 폭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 피해자에게 정신적 피해를 키울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관계부처 대응은 더딘 상황이다. 국무총리 산하 학교폭력대책위원회는 지난해 4월 사이버폭력 전담기구를 방송통신위원회에 설치하겠다고 밝혔지만 현재까지 진척이 없다. 방송통신위원회 관계자는 “여러 부처들의 협력이 필요한데 아직까지 뚜렷한 성과는 없다. 내년에야 가능할 것 같다”고 답했다.

또 교육부는 지난 5일 학교폭력 실태조사를 발표하며 ‘학생보호 통합 온라인 지원 시스템’을 개발하겠다고 했지만 이 역시 내년에야 시범운영이 예정돼 있다.

피해자들에게 법률 자문을 제공하는 학교폭력 전문 변호사들은 ‘증거’ 수집이 어려운 사이버 폭력의 특성을 언급했다. 권동영 윈앤파트너스 법률사무소 변호사는 “챌린지를 가장하지만 실제로는 괴롭힘이 목적인 영상을 찍는 등 새로운 유형들이 나타나고 있다”며 “피해자 모르게 가해자들이 영상을 공유한다면 증거수집 확보 자체를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사이버 폭력은 ‘원천 차단’이 불가능하다는 지적도 있다. 청소년들의 디지털 기기 사용 자체를 막기에도 한계가 있어서다. 이에 폭력이 발생할 시에 적극적으로 피해를 호소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김석민 푸른나무재단 연구원은 “눈에 그 증거가 보이는 신체폭력과 달리 사이버폭력은 정신적 피해가 대부분이라 호소가 어렵다”며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어른들의 한마디가 피해자를 무력하게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이 교수 역시 “학교 차원에서도 피해사례를 학부모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려 경각심을 가져야 학생들도 증거를 적극적으로 수집해 주변에 알릴 수 있다”고 당부했다. 박혜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