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주소현 기자] “병 가져오시면 세제 무료로 드려요.”
2일 서울 동작구 중앙대 사범대 부속 중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마을 축제. 한 켠에는 일회용 플라스틱 컵부터 빈 잼 병, 샴푸 펌프까지 손에 든 줄이 늘어섰다. 세탁세제, 섬유유연제, 주방세제 등 액체류를 사기 위한 줄이다.
용기 없이 내용물만 파는 ‘리필스테이션’이라는 점 외에 주민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었다. 바로 필요한 양 만큼 자동으로 살 수 있는 자판기라는 점이다.
용기 없이 세제류만 파는 이 자판기의 이름은 지구자판기. 한번 쓰이면 버려지는 플라스틱 포장재를 줄이는 동시에 구매의 편리함과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소셜벤처 사라나지구에서 고안한 자판기다.
용기 없이 액체류만 무인으로 판매하는 리필스테이션은 해외에서는 꽤 흔하지만 국내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는 게 서사라 사라나지구 대표의 설명이다. 액체류를 소분하기 위해 친환경 제품 판매점에서 소분을 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같이 액체 세제류를 자판기에 넣어 무인으로 판매하겠다는 아이디어는 서 대표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됐다. 환경과 창업에 관심이 많던 대학생 시절 서사라 대표는 일회용품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리필스테이션을 애용했지만 가까운 곳에 가게가 없으면 번거로웠던 탓이다. 고체 비누 형태는 비누가 녹거나 곰팡이가 스는 등 사용하기 불편하다는 이유도 있었다.
서사라 대표는 “창업 초기에는 제로웨이스트샵이 많지 않아서 접근성이 떨어져 리필 문화가 확산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며 “액체지만 판매하는 방식만 바꾸는 게 절충안이라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처음부터 무인의 자동 판매가 가능했던 건 아니다. 자판기 1대를 제작하는 데에만 수천만원씩 드는 탓에 대학생 소셜벤처 창업으로는 부담이 됐던 탓이다. 이에 서사라 대표는 리필 판매의 수요를 파악하기 위해 자판기 모형 안에 직접 들어가 세제를 판매하는 식으로 2020년 9월께 ‘1세대 지구자판기’를 내놨다. ‘음성 인식’ 기능이 있다며 어설프게 시작한 세제 리필 판매가 호응을 얻으면서 실제 자판기를 제작하고, 창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날 현장에 있던 자판기는 2세대 자판기다. 행사에서는 용기를 없이 내용물만 판매하는 ‘리필스테이션’ 홍보 차원에서 무료로 세제를 나눠줬지만 보통 100㎖에 700원에 판매된다. 자판기 상단의 큐알코드를 휴대폰으로 인식하면 구입할 품목과 용량을 선택, 결제하고 공병을 입구에 갖다대면 자동으로 세제가 나온다.
뿐만 아니라 세제 판매보다는 B2B(기업 간 거래), B2G(기업과 정부 간 거래)에서 수익을 내는 점도 가격을 낮추는 데 한 몫 했다. 특정 기업의 생활용품 취급하거나 주민센터 등에 자판기를 대여 및 판매하는 게 주된 수익 모델이다.
국내에서도 아모레퍼시픽, 이마트, 더바디샵 등의 일부 매장에서는 리필 판매를 하고 있다. 그러나 위생에 민감한 대기업 특성 상 소비자가 가져오는 병에는 판매하지 않고 있다. 리필용 공병을 따로 판매하거나, 아예 병에 담아둔 채로 판매하는 경우가 나오면서 리필의 취지가 무색해졌다고 봤다.
지구자판기도 공병을 재사용하기 위해서 오는 11월부터 새로 만들 3세대 자판기에서는 병 세척 및 소독 기능까지 추가할 예정이다. 터치스크린도 도입해 편의성을 높인 뒤 아파트 단지나 청년 주택, 주민센터 등에 자판기를 설치하는 게 목표다.
서사라 사라나지구 대표는 “자판기 특성 상 매장 운영비나 인건비가 들지 않아 리필스테이션 중에서도 가격대를 저렴하게 책정했다”며 “자판기로 리필의 접근성을 높여 플라스틱 쓰레기를 줄여가야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