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GCC에 위안화 결제 요청...달러 패권 위협
대러 제재로 미·러로 양분된 세계 에너지 시장
갈 곳 없는 러시아산 에너지, 中이 독차지 우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세계 에너지 시장에 잠재해 있던 단층을 자극해 거대한 분열을 일으키고 있다.
원유와 석유 제품 수출 1위를 자랑하던 러시아를 퇴출시킨 서방은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미국에 매달리게 됐고 중국과 이란, 중동 등 미국과 정치적 대척점에 있거나 미·러 사이에서 시소게임을 하던 국가들은 러시아 산 원유와 천연가스에 구미를 당기고 있는 참이다. 여기에다 최대 에너지 수입국으로 부상한 중국이 사우디아라비아 원유를 위안화로 결제하겠다고 나서며 ‘페트러달러’의 패권마저 위협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지난해 12월 9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열린 중국-걸프협력회의(GCC) 기조연설에서 “향후 3~5년 내 GCC 국가로부터 석유와 천연가스 수입을 늘리고 위안화로 결제할 것”이라며 “GCC 국가들은 석유와 위안화 결제를 위해 상하이 석유·천연가스 거래소(SHPGX)를 충분히 활용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사실상 1970년대 이후 세계 금융 질서를 지탱해 온 ‘페트로달러’ 체제의 해체를 요구한 것이다.
중국과 사우디는 그린수소, 태양광, 정보기술(IT), 클라우드, 운송, 물류 분야에서 약 1100억리얄(약 39조원) 규모의 협정도 체결했다. 지난 7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사우디를 방문했지만 빈손으로 돌아간 것과 비교하면 대조적이다.
이에 대해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마저 “2016년부터 위안화로 원유를 거래하는 방안을 추진해온 중국이 결실을 눈앞에 뒀다”며 “페트로달러 체제가 중대한 기로에 놓였다”고 평가했다.
페트로달러 체제는 지난 1974년 이후 미국과 사우디 간에 원유 결제를 달러를 통해서만 하겠다고 합의한 것을 이른다. 제 4차 중동전쟁에서 미국이 이스라엘 편에 서자 세계 최대 산유국 사우디는 미국에 원유 공급을 중단해 1차 오일쇼크가 발생했다. 이에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이 파이잘 사우디 국왕을 만나 원유 결제 통화를 달러로 제한하는 대신 대규모 군수 물자를 사우디에 판매한다는 합의를 이끌어 냈다. 사우디 입장에선 최대 석유수입국인 미국으로부터 안보보장을 받는 대신 달러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어 밑질게 없었다. 1971년 금 태환 중지 이후 가치가 폭락한 달러가 다시 한번 기축 통화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한 순간이다.
페트로달러 체제가 도입되면서 중동에서 원유를 구매하려는 세계 각국은 달러를 지불해야 했고 산유국은 벌어들인 달러를 미국 금융기관에 예치하거나 미 국채 등 미국 내 자산에 투자했다. 미국은 다시 이 돈으로 상품을 수입해 세계에 돌려주는 달러 순환 체계를 구축했다. 이로써 달러는 막강한 군사력과 함께 미국의 패권을 지탱하는 든든한 두 개의 기둥이 됐다.
이렇게 굳건한 페트로달러 체제에 중국이 도전할 수 있게 된 것은 빠른 경제 성장으로 미국이 차지하고 있던 최대 에너지 소비국 지위를 2010년 빼앗았기 때문이다. 중국의 원유 수입량은 2001년 하루 121만배럴에서 지난해 1020만배럴로 늘었다. 반면 미국은 2010년대 들어 셰일가스 생산량이 크게 늘면서 원유 수입량이 2008년 하루 542만배럴에서 지난해 80만배럴로 급감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으로부터의 수입 의존도도 같은 기간 80%에서 13%로 축소됐다.
미국과의 경제적 연대감이 줄고 중국 의존도가 높아지자 사우디 등 중동 산유국들은 미국의 세계 전략에 사사건건 반기를 들고 나섰다. 특히 예멘 내전 문제와 빈살만 왕세자의 카슈끄지 암살 문제를 두고 미국 민주당 정부와의 관계가 껄끄러워진 사우디는 미국의 원유 증산 요구를 거부해 인플레이션으로 곤혹스러운 미국의 발목을 잡았다. 또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는 UN 안보리 결의안 투표에 기권하고 시리아의 아사드 대통령과 정상외교를 복원하면서 미국을 자극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그에 대한 서방의 제재는 역설적으로 미국의 에너지 패권을 갉아먹고 중국의 입지를 더 강화시켰다.
러시아의 원유와 천연가스의 최대 소비국이었던 유럽연합(EU)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빠르게 러시아 의존도를 낮추고 있다.
서방의 에너지 제재는 가뜩이나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재정이 쪼들리는 러시아에 경제적 위기를 몰고 왔다. 러시아 정부 재정 수입의 62%를 점하던 가스 및 원유 세액이 급감하면서 지난 5월 누적 278억달러 흑자였던 재정 수지는 4분기 적자로 돌아선 것으로 추정된다. 경제 위기를 피하기 위해선 유럽 대신 원유와 천연가스를 사줄 고객이 필요해진 셈이다.
이때 유럽의 빈자리를 메우며 러시아의 위기감을 덜어준 곳이 바로 중국이다. 중국은 2월 하루 71만3000배럴 수준이던 러시아 산 원유 수입 규모를 지난해 6월 129만1000배럴까지 늘리며 러시아의 새로운 구원투수로 등장했다.
박영훈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노드스트림1과 야말 파이프라인 가동 중단으로 당장 판매처를 찾지 못하는 러시아의 천연가스 역시 중국이 가져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중국의 천연가스 자급률은 2010년 89%에서 지난해 55%로 빠르게 하락하고 있다. 2060년 탄소 중립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천연가스가 과도기에 석탄을 대체해야 하기 때문이다. 향후에도 중국 입장에서 정치적 관계가 껄끄러운 미국보단 러시아의 천연가스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최근 러시아 국영 석유기업 가즈프롬이 시베리아 이르쿠츠크 지역에 새로 건설한 코비크타 가스전의 천연가스는 ‘시베리아의힘’으로 명명된 천연가스관을 통해 중국과 연결된다.
대니얼 예르긴 S&P글로벌 부회장은 “주로 경제적 효율성에 의존했던 에너지 시장이 이제는 정치와 갈등에 의해 재편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문제는 다극화, 분절화된 에너지 시장은 필연적으로 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박영훈 연구원은 “유럽은 러시아 천연가스를 대체하기 위해 내년 사상 최대 규모의 천연가스를 재고를 비축해야 한다”면서 “2050 탄소 중립을 달성하기 위해 정제 설비 폐쇄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수요가 급증하면 가격 상승은 필연적”이라고 내다봤다. 원호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