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공황장애 극복한 김지수 작가 인터뷰
“나를 사랑하니 내 병도 사랑하겠다는 마음으로 관리”
“마음 소리에 귀 기울이며 자신 마주하는 시간 늘려야”
[우리사회 레버넌트]
‘바닥’에서 ‘반전’은 시작됩니다. 고비에서 발견한 깨달음, 끝이라 생각했을 때 찾아온 기회. 삶의 바닥을 전환점 삼아 멋진 반전을 이뤄낸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위기를 겪고 있다면, 레버넌트(revenant·돌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보세요. 반전의 실마리를 발견할지도 모릅니다.
[헤럴드경제=안효정 기자] “환자분, 성폭행 당하신건가요?” / “…….”
“괜찮습니다. 말씀해보세요. 성폭행인가요?” / “…….”
2015년 8월, 경기도의 한 대학병원 응급실로 실려온 여성을 보고 의사가 재차 물었다. 허벅지까지 말려 올라간 원피스, 어디선가 긁힌 듯 상처 난 다리, 벗겨진 샌들…. 의사는 여성의 모습을 보고 성폭행을 의심했지만 곧이어 응급실에 들어온 여성의 어머니는 성폭행이 아닌 공황장애가 원인이라고 말했다. “원래 이렇게까지 심했던 적은 없었는데 어떡하나요, 선생님.” 여성의 어머니가 울먹였다. 몇분 후 정신과 전문의가 응급실로 내려왔고, 여성은 전문의의 구령에 맞춰 힘껏 호흡을 시도했다.
지난 5일 헤럴드경제와 만난 작가 김지수(47) 씨는 9년 전 여름날의 기억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김씨는 “당시 약속이 끝나고 집으로 가던 길 택시 안에서 공황장애로 인한 발작을 처음 겪었다”면서 “온 몸이 굳고 혀가 목 뒤로 넘어간 것만 같아 어떤 소리도 낼 수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김씨는 자신에게 공황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2012년 여름, 우울증 진단을 받으며 알게 됐다. “모든 사람이 나처럼 항상 우울한 줄 알았어요.” 김씨는 죽고 싶다는 생각이 끊이지 않아 ‘살기 위해’ 정신과 문을 두드렸다.
의사는 김씨의 경우 우울증이 이미 중증 상태에 이르러 공황장애, 불안장애까지 같이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김씨의 손을 꼭 잡고 “정말 많이 힘들었을텐데 이렇게 버텨주셔서, 또 제게 와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우울함이 자연스러운 감정인 줄 알았다는 김씨. 그는 자신이 겪은 우울의 근원을 20대에서 찾았다. 스무살이 되던 무렵, 아버지의 난치병 소식을 듣게 된 김씨는 불행했던 가정사에 얽매이는 삶을 살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악착같이 홀로 서울살이를 해나갔다. 수십개의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을 벌었고 잠자는 시간, 밥 먹는 시간 등을 쪼개 취업을 준비했다.
김씨는 쉴 틈 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며 앞만 보고 달려온 덕분에 2011년 11월, 꿈의 직장에서 보건의료 전문기자로서 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꽃길을 기대했던 그는 그때를 기점으로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잠식됐다. “유독 봄이 싫었거든요. 봄이 온다는 것 자체만으로 그냥 징글징글하고 끔찍했어요.”
한번은 진동 칫솔을 촬영하기 위해 영상취재팀 후배들과 대형 마트를 찾았다. 김씨는 자신도 모르게 생활용품 코너로 가 마트 직원에게 번개탄이 어디있는지를 물었다. 의사는 김씨가 무엇에 이끌리듯 번개탄을 집어든 건 그만큼 오랜 시간 우울증을 방치했기 때문이라며 그에게 적극적으로 치료를 권했다.
“저를 미치도록 괴롭힌 부정적인 생각들이 결국 병에서 비롯된 하나의 증상이라는 걸 알았을 때,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치료로 해결될 수 있는 거니까요.” 김씨는 2012년 여름부터 주치의의 가이드를 그대로 따랐다. 규칙적인 생활 리듬을 갖기 위해 기상 및 취침 시간, 식사 시간 등을 고정했다. 졸음과 소화불량, 체중 증가 등 우울증·공황장애 약의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불필요한 약속을 줄이며 잠을 챙겼고, 건강한 식단을 유지하는 것은 물론 매일 2시간 이상 빨리 걷기 운동도 했다. 주기적으로 주치의를 만나 상담을 받았으며 휴가 때는 정신과 병원에 가 휴식을 취했다.
그럼에도 우울증과 공황장애는 김씨의 관리된 삶을 뚫고 불쑥 덮치곤 했다. 특히 퇴근길에 주로 발생했다. 행여나 일하는 중에 증상이 나타날까 근무지에선 잔뜩 조였던 긴장의 끈이 집으로 가는 길에 ‘탁’ 풀어지면 김씨는 어떤 방어도 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그곳이 지하철 안이 됐든 길거리가 됐든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고 카메라를 켜 촬영을 해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술 취한 사람으로 오해받아 욕을 먹어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김씨는 숨 막힐 듯한 증상을 가라앉히기 위해 오로지 자신의 호흡에만 집중했다. 그 방법은 이러했다. 먼저, 비닐봉지를 입에 대고 한껏 숨을 크게 들어마신 뒤 내뱉는 과정을 반복한다. 마음 속으로 ‘하나 둘, 하나 둘’ 소리내며 부풀다가 줄어드는 봉지를 관찰한다. 비닐봉지가 아닌 하늘색 풍선을 불고 있는 것이라고 상상하며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그러다보면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멀쩡해졌다. “공황장애는 한여름 소나기 같아요. 막 몰아치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해지거든요.” 김씨는 항상 비닐봉지와 진정제, 물을 넣을 수 있을 만한 큰 가방만 들고 다닌다.
무엇보다 김씨를 가장 힘들게 했던 건 병의 재발이었다. 의사조차 “이렇게 치열한 노력파 환자는 처음”이라고 할 정도로 주치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른 결과 김씨는 2013년 봄부터 서서히 증세를 회복해 2년여간 ‘다 나은 것처럼’ 지낼 수 있었다. “마비돼 제 기능을 하지 못했던 감각들이 살아나는 느낌이 들었어요. 아, 내 인생에도 봄이 오는 구나 싶었죠.”
하지만 2015년 여름 택시 안에서 증세는 되살아났다. 재발한 병 앞에 김씨는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왜 이 병을 이겨내질 못할까’, ‘죽을 힘을 다해 노력했는데도 재발한다면 어떻게 해야하나’ 등의 생각에 사로잡혀 좀처럼 충격을 벗어나지 못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병을 받아들이는 것 뿐이었다. 그는 “힘들었지만 미워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난 나를 사랑하니까 내 병 또한 사랑하겠다고 다짐했다”고 했다.
“재발을 계기로 병에 대한 접근 자체가 바뀌었어요. 우울증을 싸워 이겨야하는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어린아이를 달래듯 잘 관리해야 하는 대상이라고 인식을 전환했습니다.” 김씨는 그렇게 생각의 터닝포인트를 찾고 다시 중심을 잡아갔다. 그는 지난해 봄 ‘완치’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도 언제든 재발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만약의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지 ‘시뮬레이션’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달라진 건 병에 대한 인식뿐만이 아니었다. 김씨는 자신과 같이 ‘봄’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이들을 도와주고 싶다는 열정이 생겼다. 보건의료 전문기자로서 잘못된 이해와 편견으로 치료를 주저하는 우울증 환자들이 더는 없도록 의학 정보를 알기 쉽게 보도하고자 노력했다. 기자를 그만두고 난 지난해부터는 작가로 전향해 책으로써 우울증을 잘 관리하는 방법을 알리고 있다. 우울증을 방치하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놓일 위험성이 높아진다는 것, 완치가 어려운 경우라도 꾸준히 치료 및 관리하면 일상을 누릴 수 있다는 것 등을 경험담 바탕으로 전하고 있다.
“우울증은 치료가 꼭 필요한 ‘뇌의 질환’입니다. 뇌는 감정이든 생각이든 학습을 하려고 하는 특성이 있는데요, 우울증이 한번 생기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기력함, 슬픔 등에 휩싸여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울감으로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는다면 반드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우울증을 개인 의지만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건 도리어 화를 부르거든요.”
3923일. 김씨가 우울증과 싸워온 날들이다. 4000여일의 시간을 버티면서 김씨는 마음이 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습관을 갖게 됐다고 했다. 그는 우울증과 공황장애, 불안장애 등으로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항상 내 마음이 어떠한지, 취약한 점은 무엇인지 등 세심하게 바라보고 살펴야 한다”면서 “마음을 통해 나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을 늘려가야 품격있고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