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택공급 충분하다’며 공급 소홀하던 정부

임기 2년도 안남기고 대규모 공급 대책 발표

공공주도로 수도권에만 200만가구

“숫자 맞추려 무리한 공급 밀어붙여 위험 자초”

‘뒤늦게 서두르다 탈났다’…LH 사건, 文정부 공급대책 한계 노출[부동산360]

[헤럴드경제=박일한 기자] “문재인 정부에서 뒤늦게 추진한 공공 주도 공급 정책의 구조적 한계가 드러났다”. 국민적 공분을 사고 있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 임직원들의 투기 의혹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가다. 단순히 LH 직원 몇몇의 일탈이 아니란 이야기다. ‘고집’, ‘철학부재’, ‘공공만능주의’, ‘숫자놀음’이란 4가지 키워드로 문 정부의 공급 정책의 문제점을 풀었다.

▶고집= “부동산 가격을 잡아주면 피자 한 판씩 쏘겠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취임 직후 집값이 계속 오르자 정부부처 관료들에게 했다는 말이다. 문 정부는 출발부터 뛰는 집값이 최대 난제였다. 해결책은 다주택자와 투기세력 규제였다. 공급은 충분하다는 게 공식 입장이었다. 김현미 전 국토교통부 장관은 지난해 7월까지 “주택공급은 충분하다”고 했다. 정부가 투기와 전쟁을 치르는 동안 집값은 계속 뛰었다. 서울 아파트값의 경우 2020년에만 22.8% 올랐다.(실거래가 변동률) 시장 전문가, 학계 등 곳곳에서 공급을 늘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고집을 꺾지 않았다. 집값이 오르는 건 다주택자와 투기세력 때문이니 이들을 규제하면 곧 시장이 안정될 것이라는 입장을 반복했다.

정부가 투기와 전쟁을 벌이는 동안 공급은 매년 빠르게 줄고 있었다. 민간부문 전국 주택 인허가 실적은 문재인 정부 출범 직전인 2016년 65만246채에서 2017년 57만6812채, 2018년 47만3054채, 2019년 39만4349채, 2020년 37만5713채로 계속 감소했다. 서울만 따지면 2017년 10만2435채에서 매년 감소해 2020년 5만3932채까지 줄었다. 통상 집값이 상승하는 시기 사업을 서두르는 곳이 많아져 인허가가 늘어나는데 오히려 감소하는 ‘이상 현상’이 나타났다. 인허가 물량 감소는 올해부터 본격적인 입주량 감소로 이어져 주택시장을 더 불안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정부가 고집을 부리며 ‘불통’ 이미지를 쌓는 동안, 주택 공급 상황은 더 악화됐다.

‘뒤늦게 서두르다 탈났다’…LH 사건, 文정부 공급대책 한계 노출
변창흠 국토교통부 장관이 9일 국회에서 열린 국토교통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현안 보고를 하고 있다. [연합]

▶철학부재= 정부가 지난해 8월 발표한 ‘8·4공급대책’과 올 2월 내놓은 ‘2·4공급대책’은 20번이 넘는 이전 정책들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한다. 주택 수요를 줄이기 위해 세금, 대출 등 규제를 강화하는 정책이 이전 정책의 핵심이었다면 이젠 공급에 전념하겠다는 확실한 태세전환을 예고했다.

국토부는 올해 청와대 업무보고에서 ‘주택 공급 확대 역점’을 첫 번째 과제로 제시했다. 하지만 정부가 왜 태세를 바꿨는지 납득할 만한 설명은 없었다. 3년 넘게 공급에 별 관심을 두지 않던 정부가 6개나 되는 신도시를 무더기로 지정하고, 도심에 수십만가구를 짓겠다고 입장을 바꾸자 시장은 당황했다.

문 정부의 공급 정책에 ‘철학이 없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한편에선 공급이 충분하다면서 대규모 주택 공급 계획을 발표하고, 집값이 반값 수준으로 떨어져야 한다면서 주택 공시가격은 대폭 올리는 앞뒤가 맞지 않는 정책이 계속 나왔다. 출범 직후 ‘후분양제’(집을 다 지은 후 분양하는 것)가 바람직하다고 했던 정부는 지금은 ‘선분양’(착공 시점에 분양하는 것) 보다도 1~2년 먼저 ‘사전 분양’을 하겠다고 서두르고 있다. 입대사업자로 등록하면 세제·금융 등 각종 혜택을 준다더니 갑자기 임대사업자를 투기세력으로 규정하고 혜택을 없애기도 했다. 그럴 수록 오락가락한 정부에 대한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공공 만능주의= 요즘 문재인 정부를 통째로 흔들고 있는 LH 직원들의 투기 의혹은 ‘공공 만능주의’가 만든 산물이란 지적이 나온다. 임기가 2년도 남지 않은 정부가 공공 주도로 수도권에만 200만가구가 넘는 주택을 단기간에 공급하려고 서두르다 탈이 났다는 것이다. 서진형 대한부동산학히 회장(경인여대 교수)은 “공공 주도로만 가다 보면 정부 독점을 통해 오늘과 같은 LH 사태가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공공도 조건에 따라 악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걸 간과했다. 민간의 부동산 거래는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며 감시했지만, 정작 자신의 감시 체제는 마련하지 않았다. 변창흠 국토부 장관은 9일 국회에서 현안보고를 통해 “신도시 개발업무는 그 특성상 내부정보를 활용한 투기행위 가능성이 있는데 내부 통제장치가 부실했다”고 인정했다.

공공은 그리 깨끗하지도 않다. 당장 공공 주택공급을 주도하는 LH와 SH공사에 대한 국민권익위원회의 ‘청렴도 측정 결과’는 모두 낙제점인 ‘4등급’이다. 툭하면 직원들의 투기, 금품 수수, 불법 하도급 등 각종 사건이 터진다. 정부가 공공 주도로 대규모 주택공급을 추진하려면 내부 단속부터 시작했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공공은 사실 사고도 많이 치는 존재다. 최근 5년간 공무원들이 벌인 직무유기, 직권남용, 수뢰, 증뢰 등 공무원 범죄는 계속 급증하는 추세다. 검찰청에 따르면 공무원이 공무원 범죄로 기소된 건수는 2016년 1775건에서 2017년 1960건, 2018년 2557건, 2019년 2640건으로 계속 늘어났다. 공공에 대한 신뢰가 민간 보다 결코 높다고 하기 어렵다. 정부 정책에 대한 불신이 커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공공이 모두 다 (공급)한다고 하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졌다”며 “그런 나라는 없다”고 강조했다.

‘뒤늦게 서두르다 탈났다’…LH 사건, 文정부 공급대책 한계 노출
지난 은 7일 서울 영등포구 63빌딩 전망대에서 바라본 아파트. [연합]

▶숫자놀음= “물 들어올 때 노저어라” 평소 알고 지내던 한 소규모 주택 건설업체 사장은 최근 카톡 프로필을 이렇게 바꿨다. 정부가 작년 말 도심에 매입임대주택 공급실적을 대폭 늘리겠다고 한 이후 LH가 실적을 채우려고 도시형생활주택 등 매입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어 어느 때보다 사업의 호기를 맞았다는 게 이 사장의 설명이다. 그는 “옛날엔 LH와 매입 약정을 맺으려면 입지 여건 등 조건이 까다로웠는데 요즘은 웬만하면 진행하자고 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단기간 주택공급을 늘리려면 이런 식으로 무리수가 생기기 마련이다. 숫자를 채우기 위해 입지 여건이 좋지 않은 지역 주택도 적극 매입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나중에 빈집으로 남아 골칫거리가 될 수 있다. LH 직원들은 각종 유혹에 시달릴 것이다. 친인척 등을 동원해 직접 사업을 하려는 욕심이 생길 수도 있다. 신도시 보상 작업을 하는 직원도 마찬가지다. 보통 LH 직원은 감정평가사와 함께 움직이면서 보상액을 책정한다. 감평사의 판단으로 보상액이 크게 좌우된다. 단기간 어마어마한 금액의 보상액을 결정해야 한다. 역시 무수한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더군다나 변 장관도 인정했듯 내부 통제장치도 부실하다.

한문도 연세대학교 정경대학 교수는 “이번 LH 직원 투기 사건은 정부가 공공기관 직원들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 시스템이 만들어 중장기 계획대로 차근차근 진행했다면 생기지 않았을 사건”이라며 “문재인 정부 공급 정책의 구조적인 한계를 드러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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