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주소현 기자] “빌라나 공동 주택 화단에 있는 식물들은 특히 그냥 버리고 가는 경우가 많아요.”
가파르고 좁은 골목길을 숨 가쁘게 올라온 마을 버스가 떠나자 적막만 남았다. 서울 은평구 갈현동 재개발 현장. 재개발이 시작되면서 대부분 세대가 이사를 갔다. 골목 모퉁이마다 버려진 커다란 쓰레기봉투와 부서진 나무판자, 매트리스 등이 이를 보여줬다.
사람이 떠난 곳을 독차지한 건 식물들이었다. 꽃잎을 떨어뜨리고 더욱 푸르러진 개나리부터 아직 꽃잎이 성성한 황겹매화, 명자나무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대문 안쪽엔 한때 텃밭이었는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성하게 웃자란 풀들이 가득한 화단도 있었다.
이곳에서 고무줄 바지에 장갑을 끼고 삽을 쥐고 있는 백수혜 작가와 만났다. 공덕동부터 연희동, 노량진 이제는 갈현동까지, 벌써 3년째 재개발 단지에 덩그러니 남은 ‘유기’ 식물들의 ‘구조’를 자처하고 있다.
이곳에서 구출된 식물들은 마포구 공덕동의 백수혜 작가의 자택 마당 한 켠에 마련된 ‘식물유치원’에서 생명력을 되찾은 뒤, 새로운 주인을 만나면 ‘졸업’하게 된다.
유기 식물의 구조는 모습을 알아보는 데서 시작된다. 잡초 더미로만 보이는 풀 속에서 백수혜 작가는 식물들의 이름을 불러줬다. 나물로 많이 먹는 바아취, 뿌리를 끓여 차로 마시는 무늬둥글레, 종지나물이라고도 불리는 서양제비꽃 등이었다.
백 작가는 작은 삽으로 살살 파 뿌리 채 뽑아내 낡은 화분 한 켠에 종류 별로 누였다. 처음에는 맨손, 그 다음에는 일회용 숟가락과 플라스틱 음료 컵에 식물들을 담아냈다.
분무기로 뿌리를 충분히 적시고 물기가 마르지 않도록 신문지로 감싸주면 집에 가는 동안은 버틸 수 있다.
데려가고 싶은 식물들은 많지만 모두 함께 갈 순 없다. 너무 큰 나무나, 한해살이 풀, 시멘트 틈새로 자라고 있는 식물들은 자리에 둔다. 자칫 무리하게 구조하다 죽어버릴 수 있어서다. 대신 꽃나무들은 꺾꽂이(삽목)을 시도한다.
“갈현동에만 10번 넘게 왔는데도, 올 때마다 새로운 식물들을 마주쳐요. 이래서 다시 안 올 수가 없다니까요.”
백수혜 작가는 바로 전날엔 트럭에 커다란 나무를 실어갔다. 이날은 흰색 스쿠터에 챙겨온 고무통에 식물 몇 뿌리와 꽃나무 몇가지를 고이 모셨다. 그는 “두고 가면 죽어버릴 텐데 제가 데려가면 살 확률이 50%는 되지 않을까요?”라고 되물었다.
2021년 여름 새로 이사 온 동네 마실에서 만났던 알로카시아가 식물유치원 첫 입학생이다. 지리도 익힐 겸 돌아다니다 좋은 그릇이 있으면 주워오던 차에 쓰레기 더미 속 알로카시아를 만났다. 백 작가는 “그동안 식물들을 마치 배경처럼 여겼다. 하지만 한번 이를 인지한 뒤론 이대로 두면 이 식물들이 어떻게 될까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렇게 하나 둘 모인 식물들이 쌓이면서 이들에게 새 주인을 찾아줄 방법으로 고안한 게 ‘식물유치원’. 식물에 관심 많은 이들이 모인 트위터 계정 이름이다.
백 작가는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구조된 식물이 새 주인과 만나는 졸업식을 연다. 매달 졸업식을 여는 게 백 작가 올해의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