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증권사 등 대거 합격점…혁금 신청 후 올 연말 상품 판매
'철두철미' 장기 안정 투자가 강점…개인화 비용도 낮아 주목
[헤럴드경제=서경원 기자] 기계가 고객 은퇴 자금을 알아서 불리는 'AI(인공지능) 퇴직연금'이 국내 본격 상용화를 앞두고 있다. 국내 주요 증권사와 자산운용사가 개발한 퇴직연금용 AI 알고리즘(전산 논리체계) 200여종이 대거 금융당국의 첫 심사를 통과한 것이다. 이 AI 퇴직연금 상품은 혁신금융 신청 절차를 통해 올해 연말부터 판매된다. 침체에 빠진 투자용 AI(로보어드바이저)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을 계기로 주목된다.
18일 금융투자 업계에 따르면 코스콤은 작년 10월 최초로 퇴직연금 AI 알고리즘의 검증 심사(‘테스트베드 심사’) 신청을 받았고, 8개월의 평가 끝에 지난달 말 신청 업체에 심사 결과를 통보했다. 해당 심사를 통과한 알고리즘은 206종으로, 신청 업종별로 보면 증권사 33종, 자산운용사 78종, 투자자문·일임사 95종이다.
심사 통과 업체에는 국내 주요 증권사와 자산운용사가 대거 포함됐다. 증권사 중에선 NH투자증권이 알고리즘 9종이 합격해 가장 수가 많았다. 미래에셋증권(8종), KB증권(7종), 교보·삼성·한국투자증권(각 2종) 등이 뒤를 이었다. 자산운용 업종에서는 한국투자신탁운용과 미래에셋자산운용이 각각 36종과 28종이 심사를 통과해 쌍벽을 이뤘다. 로보어드바이저 서비스로 잘 알려진 쿼터백자산운용도 14종이 심사 문턱을 넘었다. 투자자문·일임 부문에서는 콴텍(50종)과 디셈버앤컴퍼니(24종)가 가장 심사 통과 알고리즘이 많았다.
코스콤에 따르면 심사 통과 업체는 올해 9월 핀테크지원센터에 혁신금융 서비스’ 지정 신청을 하고 이 절차를 통과하면 올해 12월 11일 이후부터 AI 퇴직연금 상품을 비대면으로 판매할 수 있다. AI 퇴직연금은 알고리즘 기반의 로보어드바이저(이하 RA)에 자산 투자 판단을 온전히 맡기는(일임하는) 것이 핵심이다. RA가 단순 조언을 하는 것을 넘어 미리 정한 목표에 따라 투자 종목(포트폴리오) 조정과 매수 매도 시점 등을 결정한다.
금융투자 업계에서는 RA가 사람보다 더 장기 운용을 안정적으로 잘하는 특성 덕에 AI 퇴직 연금이 상용화 시 매력이 충분할 것으로 본다. 특히 RA가 시장 상황이 나쁠 때도 편견이나 감정동요 없이 신속히 손실 방어를 할 수 있는 만큼, '위험 대비 수익' 균형을 절묘하게 맞춰야 하는 퇴직연금 운용에 적합하다는 것이 업계 다수의 평이다.
개인화 비용이 매우 적다는 것도 장점이다. 애초 프라이빗뱅커(PB) 등이 연금 고객의 취향에 맞게 일일이 투자종목이나 전략을 조정하려면 시간과 돈이 많이 들지만, AI 퇴직연금은 애초 자동화 시스템 기반이라 이런 최적화를 쉽게 할 수 있다.
금융투자 업계의 한 관계자는 "알토란 같은 은퇴 자금을 AI에 맡기는 것에 대해 일부 고객이 불안감을 느낄 수 있지만, 이런 문제는 실제로 수익 데이터(사례)가 쌓이며 빠르게 해결될 것으로 본다"고 내다봤다. 이 관계자는 "챗GPT와 같은 생성 AI(사람처럼 사고하고 말하는 AI) 기술을 활용해 RA가 연금 운용 방향을 고객의 눈높이에 맞게 친절히 설명하는 기능을 넣을 수 있는 등 상품 발전 가능성이 큰 것도 긍정적 요인"이라고 덧붙였다.
RA는 예전 시장 데이터의 패턴을 익히는 '머신러닝'(기계학습)과 통계적 예측 등의 기법을 통해 투자 판단을 내린다. 지금껏 RA는 단기 투자에선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급변하는 시장 환경에 유연히 대처하지 못해, 사람이 운용할 때보다 수익 실적이 좋지 못한 경우가 잇따랐다.
AI 퇴직연금은 이런 RA의 부진을 '역발상'으로 극복하려는 시도로 풀이된다. RA가 짧은 호흡의 투자에 탁월하지 않지만, 반면 안정성 중심의 장기 투자는 '철두철미'하게 잘한다는 사실에 주목한 것이다.
퇴직연금을 AI에 일임하는 상품은 과거 합법 여부가 불명확해 시장의 혼선이 적잖았다. 이에 따라 정부는 작년 7월 AI 퇴직연금 판매를 '규제 샌드박스'(새 서비스나 상품에 규제를 면제 및 유예하는 제도)로 허용키로 하고, 그 선결 조건으로 코스콤의 알고리즘 심사 통과를 내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