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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시절 도입된 주 52시간 근로제는 근로자의 삶의 질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산업, 직무별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획일적 적용으로 반도체 등 첨단산업에서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특히 첨단 R&D는 특정 기간에 집중적인 작업이 필요하지만, 현행 제도는 이를 제한하고 있어 기업 경쟁력에 족쇄가 되고 있다.

2022년 반도체 산업에 허용된 ‘특별연장근로제도’를 활용하면 문제가 없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지만, 산업 현장에서는 R&D 현실과 전혀 맞지 않는 제도라고 지적한다. ‘특별한 상황’임을 입증해 사전에 고용노동부 장관의 승인을 받아야 하고 절차도 복잡할 뿐 아니라, 사용도 연간 90일로 한정돼 있어 유연한 운영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 대안으로 기업들은 ‘선택적 근로시간제’를 활용하고 있으나 정산기간이 3개월 단위로 짧아 이마저도 실효성이 높지 않다.

경쟁국들은 지식·기술 집약적인 고임금 근로자에 대해서는 근로시간 제도를 보다 유연하게 적용하고 있다. 일본은 ‘고도 프로페셔널 제도’를 도입해 노사 합의 시 근로자의 건강을 보호하면서도 생산성을 극대화한다. 미국은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제도에 의해 고임금 전문 직종은 초과 근로 수당이나 근로시간 적용을 제외한다.

AI 반도체를 장악한 미국의 엔비디아는 주 7일, 24시간 가동 체제를 유지하며, 대만의 TSMC 또한 R&D 센터를 24시간 운영한다. 모두 R&D 효율을 극대화해 무한 기술경쟁에서 이기기 위함이다. 반면 우리는 경직되고 천편인륜적인 근로시간 제도로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질 위험에 놓여 있다. AI, 반도체 등 첨단 분야에서 R&D 인력만이라도 52시간의 족쇄에서 풀어줘야 한다.

다행히 최근 국회에서 주 52시간 유연 적용을 포함한 반도체 특별법(반도체산업 경쟁력 강화 특별법, 이철규 국민의힘 의원 대표 발의)이 발의되고 국민 공감대도 형성되고 있다. 그러나 절대적인 여소야대 정국에서 야당의 반대 입장, 노동계 반발 등으로 원안 통과 가능성이 불확실하다.

이제는 이해관계자 모두가 자신의 입장만을 주장하기 보다는 여러 가능성을 열어놓고 합의점을 찾아야 할 때다. 야당과 노동계는 무조건적 반대 대신 52시간제의 유연한 적용 필요성을 냉정하게 따져 봐야 한다. 그리고 기업은 근로시간의 유연 적용이 제도 자체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설득과 함께 구체적 조치를 보여야 한다. 예로써, 내부 노동시장의 관행을 줄이면서 기업간 노동이동에 중점을 둔 정책으로 전환하고, 연공임금의 커브를 완만하게 하는 등 기존의 기업주의적 고용관행을 탈피하는 방향으로 인사관리를 전환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 역시 민생 및 기업 경쟁력을 살려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노동시장 규제완화를 적극 추진해야 한다.

디지털화의 진전과 국가간 경쟁 격화, 고용형태의 다양화, 일하는 방식의 유연화 등 경영환경 변화에 따라 노동 패러다임 전환을 위한 사회적 담론이 필요한 시기이다. 첨단산업에 대한 주52시간제의 유연 적용이 그 시작점이 될 것이다. 정부와 국회는 디지털 시대에 맞는 화이트칼라(근로시간 적용제외) 제도를 서둘러 도입해야 할 것이다.

이승길 한국고용복지학회 회장 (전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