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진엽 국립현대무용단장 취임 간담회
“어떤 몸도 혼자 안 움직여”…관계·축적
12월 서소문성지 취임 첫 작품 ‘빙빙빙’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저 스스로 ‘국립’, ‘현대’, ‘무용’이라는 세 단어를 다시 곱씹어 봤어요. 국립이란 무엇이고, 현대란 무엇이며, 그렇다면 무용은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취임 5개월 차. 차진엽(48) 국립현대무용단 단장 겸 예술감독은 7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국립예술단체공연연습장에서 열린 첫 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임기 3년간 이끌 무용단의 밑그림을 ‘단어의 본질’을 되짚는 물음부터 시작한 것이다.
세 단어에서 길어 올린 큰 축은 ‘한국성, 동시대성, 몸의 본질’이다. 차 감독이 말하는 한국성은 전통 형식의 재현이 아니라, 이 땅의 시간과 삶, 역사와 환경 속에서 몸 안에 축적된 감각과 태도다. 동시대를 탐구하는 일은 현재를 이루어온 시간과 관계를 살피는 일이다. 현대무용 역시 특정 양식에 갇힌 장르가 아닌 몸으로 인간과 사회, 세계를 탐구하는 예술이라는 것이 그의 정의다.
“어떤 몸도 혼자 움직이지 않는다”…고립의 시대에 던진 공존의 윤리
오랜 고심 끝에 도출한 핵심 개념은 ‘바딩(BODYING)’. 명사 ‘몸(body)’에 진행형 어미 ‘-ing’를 붙였다. 몸을 완성된 물리적 실체나 고정된 객체로 보지 않고 환경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형성되고 변화하는 ‘과정’으로 바라보겠다는 선언이다.
차 감독은 “창작자로서 움직임을 탐구하며 깨달은 것은 내 몸의 변화가 환경과 타인이라는 모든 조건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난다는 점이었다”고 말했다. 몸은 단지 잘 훈련해 무대에 올리는 ‘표현의 도구’가 아니라, 사유하고 기억하며 타자와 관계 맺는 주체라는 것이다. 그는 “몸은 표현의 수단이 아니라 질문하는 존재”라고 규정했다.
인공지능(AI)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시대. 피지컬 로봇이 인간의 신체를 대신하기 위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지금, ‘몸의 가치’와 움직임은 달리 읽히고 있다. 차 감독이 ‘바딩’을 전면에 세운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사회의 사건들은 관념으로 남지 않고 끝내 몸에 닿는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몸의 감각이 옅어지는 때에 “몸으로 인간과 시대를 읽는 일”이 국립현대무용단의 몫이라는 뜻이다.
그는 이를 실천하는 네 가지 방향으로 ▷몸을 다시 바라보는 ‘바딩(Bodying)’ ▷몸으로 생각하는 ‘싱킹(Thinking)’ ▷발 딛고 선 장소를 감각하는 ‘플레이싱(Placing)’ ▷예측할 수 없는 변화에 응답하는 ‘에러링(Erroring)’을 제시했다.
‘바딩’의 사유는 하나의 문장으로 압축된다. ‘노 바디 무브스 얼론(No Body Moves Alone)’, 어떤 몸도 혼자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문장은 차 감독이 20여년간 안무가이자 무용수로 무대에서 얻은 자각에서 나왔다. 그는 “모든 존재는 연결돼 있고, 공존하고 있다”고 했다. 각자도생과 단절의 시대에 이 문장은 춤의 원리를 넘어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를 묻는 윤리를 이 문장 안에 담았다.
차 감독은 “몸을 통해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함께 공존할 수 있을지 질문하고자 한다”는 구상을 들려줬다. 안무가와 무용수가 충분히 질문하고 실험하며 토론할 조건을 만들고, 관객에게는 몸과 춤을 깊이 경험할 통로를 넓히겠다는 구상이다. 미션을 ‘몸으로 시대를 묻고, 춤으로 사람과 세계를 움직인다’로, 비전을 ‘함께 가꾸는 창작 공동체’로 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해외 ‘빅 네임’ 대신 우리 창작자를 ‘빅 네임’으로
이 철학은 제작 방식의 전환으로 이어진다. 내년 6월 선보일 ‘에러리스트(ERRORIST)’는 창작 과정에서 마주하는 불확실성과 시행착오를 탐구의 동력으로 삼는 제작 프로젝트다. 최종 형식과 창작 방법을 미리 고정하지 않되, 과정에서 얻은 발견을 다듬어 완성된 공연으로 관객 앞에 내놓는다.
차 감독은 “실패를 감수하더라도 미지의 영역까지 실험을 밀어붙여 새로운 형식의 작품에 도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창작 이전 단계의 사유를 뒷받침할 거점도 생긴다. 내년 연중 운영하는 ‘CTP랩(Choreographic Thinking and Practice Lab)’이다. ‘안무적 사고와 실천’을 뜻하는 이름으로, 서초동 댄스하우스를 중심으로 안무가와 서로 다른 학문·예술 분야의 펠로우가 모여 질문을 연구하고 토론한다. 작품에 앞서 질문하고 탐구하는 과정을 중요하게 두겠다는 취지다. 그 과정은 글과 영상, 퍼포먼스와 워크숍으로 기록해 무용단의 자산으로 축적한다.
차 감독은 창단 16년을 맞은 무용단의 자산이 제대로 쌓이지 못했다는 점도 솔직하게 짚었다. 그는 “그간 좋은 작품과 유의미한 담론이 많았음에도 감독이 바뀔 때마다 연속성 없이 흩어져 단체의 정체성이 다소 부실해 보였던 면이 있다”며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쏟아내는 데 머물지 않고, 한국 현대무용의 역사를 차곡차곡 다져 무용단의 ‘두께’를 두껍게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이제 국립현대무용단은 함께 가꾸는 ‘공공 플랫폼’으로서 정체성을 분명히 다져갈 생각이다. 해외 유수 무용단과 안무가를 초청해 대중성과 관객층을 확장하는 최근 무용계의 행보와는 다르다.
그는 “유명한 ‘빅 네임’을 데려오면 당장 관객을 모으기는 쉽겠지만, 국립현대무용단은 수익 단체가 아니다”며 “나 역시 현장 안무가 시절 해외 거장들의 공연을 보며 일종의 박탈감을 느끼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리 무용단의 플랫폼을 통해 국내의 뛰어난 안무가와 무용수들이 세계적인 빅 네임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토대를 놓는 것이 공적 책임”이라고 강조했다. 실력 있는 창작자를 발굴해 길러내고, 그 작품을 세계 무대에 선보이는 일까지가 국립현대무용단의 몫이라는 확고한 방향성이다.
무용단은 12월 11~12일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콘솔레이션 홀에서 차 감독의 장소 기반 퍼포먼스 ‘빙빙빙(BEING BEING 氷)’으로 첫발을 뗀다. 2020년부터 이어온 연작 ‘원형하는 몸’의 연장선에서, 사라진 존재들의 부재를 지금의 몸으로 감각하고 그 기억에 응답하는 작업이다.
내년 4월 9~11일에는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새 연작의 첫 편 ‘몸·균·살: 아직 마르지 않았다’를 선보인다. 한지 바닥에 콩댐을 거듭하며 바닥을 만들고 돌보는 행위에서 출발해, 서로 다른 몸과 노동이 어떻게 서로의 삶을 받치는지 묻는다. 감독 개인의 안무 비중은 전체의 20~25% 수준으로 안배하며, 내년 7월 이양희 안무가 초청 공연 등 국내 창작진과의 협업을 균형 있게 편성한다.
내년 8월엔 철학·과학·예술·기술의 시선으로 몸을 살피는 담론·참여 프로그램 ‘바딩/바딩(BODYING/BODYING)’을 다섯 차례 연다. 차 감독은 “대중이 현대무용에 다양한 방식으로 다가가도록 기획한 프로그램”이라고 소개했다.
차 감독은 “수치적인 성과에 조급해하기보다 현장의 예술가들과 더 깊이 호흡하고 싶다”며 “국립현대무용단이 지금 시대에 무엇을 질문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묻고 대화하는 단체가 되도록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걸어가겠다”고 말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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