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거인멸 ‘교사범’ 아닌 ‘공동정범’으로 판단

이종호 전 블랙펄인베스트 대표. [연합]
이종호 전 블랙펄인베스트 대표. [연합]

[헤럴드경제=양근혁 기자] 이른바 ‘임성근 구명로비 의혹’ 관련 해병대원 특검팀(이명현 특별검사) 수사를 앞두고 지인에게 자신의 휴대전화를 파손하도록 지시한 혐의를 받는 이종호 전 블랙펄인베스트 대표에게 무죄가 확정됐다. 대법원은 이 전 대표가 지인과 함께 휴대전화를 파손한 만큼 증거인멸을 지시한 교사범으로 단정할 수 없다는 원심 판단에 문제가 없다고 봤다. 증거인멸 교사범이 아닌 공동정범에 해당한다는 판단으로, 형사사건에서 자신의 증거를 인멸한 경우 처벌되지 않는다.

대법원 2부(주심 권영준 대법관)는 증거인멸교사 혐의를 받는 이 전 대표의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판결을 8일 확정했다. 증거인멸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지인 차모씨에게는 원심과 같은 벌금 300만원이 확정됐다.

재판부는 “원심의 판단에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않은 채 논리와 경험의 법칙을 위반해 자유심증주의의 한계를 벗어나거나 공소장 변경의 필요성, 불고불리 원칙, 증거인멸교사죄의 성립, 공동정범과 교사범 등에 관한 법리오해, 이유모순 등으로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없다”고 밝혔다.

이 전 대표는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과 관련해 김건희 여사의 계좌관리인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해병대원 순직사건의 피의자로 지목된 임 전 사단장을 구명하기 위해 김 여사에게 접촉했다는 ‘임성근 구명로비 의혹’의 핵심 당사자이기도 하다.

이 전 대표는 지난해 7월 서울 잠원한강공원 주차장에서 차씨에게 자신의 휴대전화를 파손해 버리라고 지시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차씨는 해당 휴대전화가 특검의 수사와 관련된 증거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휴대전화를 수차례 발로 밟아 부순 뒤 휴지통에 버린 혐의를 받았다.

당시 이 전 대표는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 구명로비 의혹과 관련해 특검의 수사선상에 올라 있었다. 특검은 이 전 대표가 사용하던 휴대전화를 압수했다. 이후 이 전 대표는 과거에 사용하던 휴대전화에 저장된 정보를 새 휴대전화로 옮긴 뒤 해당 휴대전화를 파손한 것으로 조사됐다.

1심은 이 전 대표에게 무죄를, 차씨에게는 벌금 300만원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이 전 대표가 차씨에게 증거인멸을 지시한 ‘교사범’이 아니라 차씨와 함께 범행을 실행한 ‘공동정범’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형법상 증거인멸죄는 타인의 형사사건에 관한 증거를 인멸한 경우에 성립한다. 자신의 형사사건과 관련된 증거를 직접 인멸한 행위는 원칙적으로 처벌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자기비호 법리’에 따라 이 전 대표를 처벌할 수 없다는 취지다.

1심 재판부는 이 전 대표가 먼저 휴대전화를 땅바닥에 던지고 차씨와 번갈아 발로 밟는 등 파손 행위에 직접 가담한 점을 ‘공동정범’으로 판단한 근거로 들었다. 또한 휴대전화에 저장된 연락처와 메시지 등이 새 휴대전화로 복사됐고, 해당 휴대전화도 수사기관에 압수된 만큼 수사에 중대한 장애를 초래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봤다.

2심 역시 이 같은 판단을 유지했다. 2심 재판부는 이 전 대표가 자신의 형사사건과 관련된 증거를 없애기 위해 타인의 도움을 요청한 행위도 원칙적으로 처벌 대상이 아니며, 예외적으로 처벌할 수 있는 ‘방어권 남용’에 해당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특검은 이 전 대표를 증거인멸의 공동정범이 아닌 교사범으로 봐야 한다며 상고했다. 아울러 증거인멸교사 혐의로 기소된 이 전 대표에 대해 공소장 변경 없이 증거인멸의 공동정범 성립을 전제로 판단한 것은 불고불리 원칙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날 대법원도 특검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이 전 대표의 무죄는 확정됐다.

한편, 앞서 이 전 대표는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 1차 주포로 알려진 이정필 씨에게 수사를 무마해 주겠다는 조건으로 25차례에 걸쳐 8000만원을 받은 혐의 등으로 징역 1년2개월의 형을 지난 7월 대법원에서 확정받았다.


yg@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