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김주리 기자] 주식시장이 급락하면 투자자들이 몰려들던 대표적인 안전자산 금이 이번에는 증시와 함께 무너졌다. 미국 기술주 투매로 국채 가격이 급등하는 상황에서도 금값은 하락세를 이어가며 온스당 4000달러 아래로 떨어졌다. 금융시장 불안에 따른 현금 확보 수요와 국제유가 상승, 미국의 금리 인상 가능성이 동시에 금값을 끌어내린 것으로 분석된다.
23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와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국제 금 현물 가격은 이날 장중 온스당 3975.23달러까지 하락했다. 지난 7월 이후 3개월여 만에 4000달러 선이 무너진 것이다.
전날 약 2.8% 급락했던 금값은 이번 주에만 4%가량 떨어지며 지난 6월 이후 최대 주간 낙폭을 기록했다. 지난 1월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며 5400달러를 넘어섰던 금값은 고점 대비 약 29% 하락한 수준이다.
금과 함께 은, 백금 등 다른 귀금속도 약세를 보였다. 국제 금 시장에서는 안전자산을 확보하려는 수요보다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자산을 매도하는 움직임이 강해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증시 폭락에 국채금리 19bp 급락…금마저 하락한 이례적 상황
이번 금값 급락이 주목받는 이유는 미국 국채시장과 정반대의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다.
지난 22일 미국 뉴욕증시에서는 인공지능(AI) 산업에 대한 막대한 투자 비용과 수익성 우려가 불거지면서 기술주를 중심으로 매도세가 확산했다.
메타 등 대형 기술주의 AI 투자 부담이 부각되자 나스닥지수는 2.6% 급락했다. 투자자들이 주식에서 자금을 빼내 미국 국채로 이동하면서 10년 만기 국채금리는 하루 만에 19bp(1bp=0.01%포인트) 떨어졌다.
일반적으로 국채금리가 하락하면 이자를 지급하지 않는 금의 상대적 투자 매력이 높아진다. 금융시장 불안이 심화할 때도 금은 대표적인 자금 대피처로 활용돼 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증시와 금 시장에서 동시에 매도세가 나타났다.
독일 투자은행 베렌버그는 미국 국채금리가 이처럼 큰 폭으로 하락하는 상황에서 금값까지 떨어진 것은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8년 12월 이후 처음이라고 분석했다.
시장에서는 금값 하락의 주요 원인으로 유동성 확보를 위한 강제 매도를 지목하고 있다.
글로벌X의 저스틴 린 전략가는 블룸버그통신에 이번 하락이 현금 확보를 위한 매도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주가가 급락하면 레버리지 투자를 한 투자자들에게 추가 증거금을 요구하는 마진콜이 발생할 수 있다. 투자자들은 이를 충당하기 위해 현금화하기 쉬운 자산부터 매도한다. 금 역시 거래가 활발하고 유동성이 높은 자산이어서 매도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주식 투자에서 발생한 손실이 금 시장으로 전이되는 현상이다.
린 전략가는 금값이 온스당 3900달러의 주요 가격대를 시험할 가능성도 언급했다.
베렌버그도 올해 초 금값이 급등하는 과정에서 유입된 투기성 자금이 빠져나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4000달러 아래에서 하락세가 이어지면 금 상장지수펀드(ETF)의 자금 유출과 추가적인 매도 압력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중동 석유시설 공격에 유가 급등…12월 금리 인상 가능성 78%
금값을 압박하는 또 다른 요인은 중동발 에너지 가격 상승이다.
최근 친이란 성향의 예멘 후티 반군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 관련 시설 등을 공격하면서 원유 공급 차질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홍해 연안의 얀부 항구와 유전 등을 겨냥한 공격으로 중동 지역의 긴장도 높아졌다.
이에 국제유가는 23일 급등세를 보였다. 브렌트유 가격은 배럴당 113달러를 넘어섰으며 장중 5개월여 만의 최고 수준까지 올랐다.
유가 상승은 미국의 물가 압력을 높여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통화정책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최근 발표된 미국 소비자물가와 생산자물가 지표가 예상보다 높게 나오면서 시장에서는 연준이 기준금리를 추가로 인상할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시카고상품거래소(CME) 페드워치에 따르면 시장 참가자들은 오는 27~28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기준금리가 동결될 가능성을 92%로 예상했다. 반면 12월 회의에서 금리가 인상될 가능성은 78%로 평가했다.
원유 가격 상승으로 인플레이션이 지속되면 연준의 통화긴축 기조도 장기화할 수 있다는 전망이 반영된 것이다.
금은 예금이나 채권과 달리 이자 수익이 발생하지 않는다. 금리가 상승하거나 높은 수준을 유지하면 금 보유에 따른 기회비용이 커지면서 투자 수요가 약해질 수 있다.
미국의 금리 인상 가능성과 증시 급락에 따른 현금 확보 수요가 동시에 발생하면서 금값에 하방 압력이 집중된 셈이다.
다만 기술주 하락으로 경기 둔화 우려가 커질 경우 연준의 금리 인상 기대가 약화하면서 금값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린 전략가는 금리 인상 기대 완화와 달러 약세 등이 금값 회복을 뒷받침할 수 있다며 급락 이후 가파른 반등 가능성을 언급했다.
시장에서는 오는 29일 발표될 미국 개인소비지출(PCE) 물가지수가 향후 금리 전망을 가늠할 주요 변수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국내 금값도 고점 대비 36% 급락…중앙은행 매입은 여전히 활발
국제 금값의 하락세는 국내 금 시장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거래소(KRX) 금시장에서 순도 99.99% 금 1g 가격은 23일 17만1250원 수준까지 떨어졌다. 지난 1월 29일 기록한 최고가 26만9810원과 비교하면 약 36.5% 하락한 수치다.
국내 실물 금 가격도 내림세를 보였다.
한국금거래소가 23일 오전 고시한 순금 한 돈(3.75g) 가격은 소비자가 구매할 때 75만1000원, 판매할 때 64만2000원이었다.
지난 1월 순금 한 돈 가격이 일부 거래소에서 100만원을 넘어섰던 점을 고려하면 고점에 금을 매수한 투자자들의 평가손실도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국내 실물 금은 구매가격과 판매가격에 차이가 있고, 부가가치세와 유통 비용 등이 반영된다. 국제 시세와 국내 거래가격의 움직임을 비교할 때도 환율과 거래 방식에 따른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
단기적인 금값 하락에도 주요 중앙은행들의 금 매입은 이어지고 있다.
골드만삭스가 지난 20일 발표한 분석에 따르면 전 세계 중앙은행의 지난 8월 금 매입량은 79톤으로 추정됐다. 2022년 이전 월평균 매입량인 17톤의 4배를 웃도는 규모다.
최근 3개월간 계절조정 기준 월평균 매입량도 85톤에 달했다.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 중앙은행들이 달러 등 주요국 통화에 집중된 외환보유액을 다변화하기 위해 금을 사들이고 있다는 분석이다.
골드만삭스는 중앙은행의 구조적인 금 매입 수요를 근거로 2027년 말 금값 전망치를 온스당 5400달러로 유지했다. 다만 미국의 통화긴축 전망과 금 관련 옵션 수요 감소 등을 고려해 올해 말 전망치인 4650달러에는 하방 위험이 있다고 평가했다.
실물 금 시장에서는 가격 하락에 따른 저가 매수세도 나타나고 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인도에서는 주요 축제인 두세라를 맞아 금 구매가 증가했다. 가격이 하락하면서 실물 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난 것이다. 반면 중국에서는 귀금속 소비자들이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장신구 수요가 제한적인 모습을 보였다.
단기적으로는 미국의 금리 정책과 국제유가, 증시 변동성이 금값의 주요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특히 투자자들의 현금 확보를 위한 매도가 지속되면 중앙은행의 실물 금 매입과 저가 매수세에도 불구하고 가격 변동성이 확대될 수 있다. 금값이 4000달러 선을 회복할 수 있을지, 추가 하락을 거쳐 새로운 지지선을 형성할지가 시장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rainbow@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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