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2월, 故이병철 삼성 선대회장이 ‘도쿄 선언’을 통해 첨단산업인 반도체 진출을 공식화했을 때, 글로벌 산업계의 시선은 싸늘했다. 특히 제조업의 글로벌 패권을 장악해 가던 일본의 미쓰비시 종합연구소는 보고서를 통해 한국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다섯 가지 구조적 이유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협소한 내수시장, 취약한 전후방 연관 산업, 부족한 사회간접자본, 글로벌 경쟁사에 비해 열악한 기업 규모, 빈약한 기초 기술력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반도체 산업에 필수적인 안정적 전력과 용수가 부족했고, 핵심 장비와 소재는 전량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그러나 한국은 과감한 선제적 설비 투자, 수출 드라이브, 특유의 속도전을 바탕으로 이 모든 한계를 정면 돌파했다. 그 결과 한국은 반도체 등 첨단 IT산업뿐만 아니라 자동차, 조선, 배터리 등 중화학공업까지 아우르는 제조업 강국으로 도약했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인도의 제조업 육성 정책 ‘Make in India’를 바라보는 시선도 그때와 판박이다. 열악한 인프라와 미비한 소재·부품 생태계로 과연 글로벌 공급망을 대체할 수 있겠냐는 회의론이다. 그러나 1980년대 초 한국과 비교해 보면 인도는 당시 우리가 갖지 못했던 독보적인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첫째, 거대한 잠재 내수시장과 강력한 정책 드라이브다. 15억에 가까운 세계 1위 인구와 빠르게 팽창하는 중산층은 막대한 소비력을 제공하고 있으며, 인도 정부의 제조업에 대한 전폭적인 세제 혜택과 규제 개선이 더해지며 글로벌 기업들의 생산 거점 유치 속도를 끌어올리고 있다.
둘째, 풍부한 소프트웨어와 엔지니어링 인재 풀이다. 이를 바탕으로 인도는 글로벌 빅테크들의 핵심 R&D 센터를 품으며 설계와 소프트웨어 역량을 확보한 상태에서 하드웨어 제조 역량을 붙여나가는 독특한 역발상 성장을 보여주고 있다.
인도 제조업 역사에는 이미 회의론을 뚫고 시장을 지배한 결정적 선례가 존재한다. 미국, 유럽의 완성차 업체들이 열악한 도로 인프라와 폐쇄적 관료제, 턱없이 낮은 구매력을 이유로 인도의 합작 요청을 외면할 때, 일본의 스즈키는 인도 국영기업 마루티와 합작 투자를 과감하게 결정했다. 공교롭게도 삼성이 도쿄 선언을 준비하던 1982년 10월 합작 계약을 체결, 이듬해 12월 첫 양산차 ‘마루티800’ 1호차를 출고했다. 이 공격적인 선제 투자는 훗날 마루티 스즈키를 인도 승용차 시장의 절반 가까이 차지하는 1위로 키워냈고, 스즈키 그룹의 핵심 수익원으로 안착시켰다.
인도 정부는 우리에게 반도체, 조선, 배터리와 같은 첨단 제조업 분야에서의 협력을 적극 요청하고 있다. 물론 중앙과 주(州)정부별 규제 격차, 현지 공급망 구축의 어려움 등 넘어야 할 산은 여전히 높다. 그러나 이들이 내민 손을 두고 인프라와 제도가 완벽히 정비되기를 기다린다면 주도권을 쥘 기회는 사라진다. 인도를 단순한 저임금 조립 기지가 아닌 미래 글로벌 밸류체인을 함께 재편해 나갈 전략적 제조 파트너로 바라보고 투자와 협력을 선제적으로 결단해야 할 시점이다. 40여 년 전 한국이 인프라와 기술의 빈곤 속에서도 반도체의 기적을 이뤄냈고, 스즈키가 척박하던 인도 자동차 시장을 선점했듯이 말이다.
윤용 한국무역협회 뉴델리지부장
kwater@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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