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어려움 호소 외면한채 시류 편승 규제 입법

모호한 기준, 과도한 형사처벌에 경영 판단 제한

400개 넘는 기준 때문에 공장 닫을 판…누구를 위한 법인가요? [비즈360]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첫 날인 지난 1월 27일 경기도 평택시의 한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안전관리자가 CCTV로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

[헤럴드경제=원호연 기자] 가습기 살균제 사태나 구미 불산 사고 등 사회적 파문을 불러오는 사건사고가 발생하면 관련된 기업들을 규제하는 규제 입법이 어김없이 이뤄졌다. 반기업 정서에 편승한 정치권의 무더기 입법으로 규제 당사자인 기업들의 의견은 대체로 묵살됐고, 운신의 폭이 좁아진 기업은 낮아진 효율과 리스크에 몸살을 앓았다.

경영계는 대체적으로 행정부와 입법부, 지방정부의 규제 개선 의지에 대해 낮게 평가하고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최근 전국 10인 이상 1112개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 발표한 ‘2022 기업 규제 전망 조사’에 따르면 기업들은 정치권의 규제 개선 의지를 모두 3점 미만(5점 척도)으로 낮게 평가했다. 특히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개선 의지가 2.82점으로 평가된 것과 비교해 국회의 개선 의지에는 2.79점으로 다소나마 더 낮게 평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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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사건 사고 이후 이어진 규제 법안이 기업들이 국회에 가진 불신의 원인이 됐다는 것이 경영계의 공통된 목소리다.

가습기 살균제 사태와 구미 불산 사고 이후 화학물질 취급을 규제하기 위해 도입된 ‘화학물질관리법’과 ‘화학물질등록및평가등에관한법’이 대표적인 예다. 2013년 더불어민주당 한정애 의원 주도로 입법된 두 법은 산업 현장의 안전을 이유로 업계의 충분한 의견 수렴과정 없이 법안이 마련됐고, 속전속결로 국회에서 통과돼 2015년부터 시행됐다.

화관법에 따라 기업들은 유해물질을 취급하는 시설을 운영하려면 413개에 달하는 기준 항목을 충족해야 했다. 사고를 내면 매출의 5%까지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특히 법 시행 전 가동에 들어간 시설에도 소급 적용이 돼 새 기준에 맞춰 시설을 개선하기 위해 공장 가동을 멈춰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화평법 역시 신규 화학물질은 물론 기존 물질을 제조, 생산, 판매하는 기업에 적용되면서 기업들은 거액의 비용을 들여 화학물질을 환경부에 모두 등록해야 했다. 등록 대상이 방대해 유해물질을 찾아내기도 쉽지 않지만, 일부 정보는 해외 제조사에 확인해야 하지만 영업 기밀을 이유로 정보를 넘겨주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대형마트의 골목상권 침해를 막기 위해 도입된 유통산업발전법은 큰 선거가 있을 때마다 규제 내용이 점차 강화됐다. 이 법에 따라 대형마트는 월 2회 휴무 규제를 받지만, 코로나19 최대 수혜를 받고 있는 이커머스 기업들은 규제에서 자유롭다. SSG닷컴이나 롯데온 등 대형마트를 운영하는 유통기업의 온라인 플랫폼은 의무휴업일에는 배달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원하는 날짜에 원하는 방법으로 생필품을 구하지 못하는 소비자의 불편은 오히려 심화하고 있다.

지난 2020년 말 더불어민주당의 주도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이른바 공정경제 3법(상법·공정거래법·금융그룹감독법)은 기업들의 경영활동을 위축시키는 대표적인 족쇄로 꼽히고 있다.

감사위원의 분리 선출과 최대 주주의 의결권을 3% 제한, 다중 대표소송제 도입을 담은 상법 개정안이 통과되자 미국계 헤지펀드인 화이트박스 어드바이저스가 LG그룹의 계열 분리를 반대하는 등 해외 헤지펀드의 국내 기업 경영권 위협 가능성도 커졌다.

또 일감 몰아주기 규제 대상을 상장·비상장 여부에 관계없이 최대 주주의 지분율이 20% 이상인 기업으로 확대한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영세한 중소기업 간 공동사업이나 기업 간 상생 목적으로 진행된 정보 교환도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경영계는 “사익편취에 해당하는지 아닌 지에 대한 기준이 불분명하다”며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둘 이상의 금융회사가 포함된 기업 집단의 경우 해당 금융회사들로 구성된 집단을 금융그룹으로 지정해 금융당국이 감독·검사할 수 있도록 한 금융복합기업감독법은 업권별 건전성 규제에 더한 중복규제라는 지적을 받았다. 게다가 이미 금융업에 진출한 카카오나 네이버에 대해서는 금융복합기업집단으로 지정하지 않아 빅테크 기업과의 형평성 논란에 직면했다.

무엇보다 종업원의 사망 등 중대 재해가 발생한 기업의 경영책임자 개인을 형사 처벌하도록 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가장 큰 반발을 불렀다. 건설, 철강이나 석유화학 등 산업재해가 빈발하는 업종의 경우, 대규모 안전 투자와 안전 교육에도 불구하고 사고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만큼, 경영책임자가 형사처벌을 피하기 위해 사고를 당한 직원과 소송전에 나설 수 있다는 목소리가 꾸준하다.

이동근 경총 상근부회장은 “모든 정부가 시장 자율성을 보장하겠다며 규제 개혁을 하겠다고 밝혔으나 실제로는 외환위기를 겪은 김대중 정부 외엔 제대로 된 규제 개혁이 없었다”면서 “최근 대부분 규제가 의원입법을 통해 도입되는 만큼 의원 입법에 대한 규제 영향 평가가 반드시 도입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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