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김은희 기자] #. 서울 서대문구 A아파트에 사는 40대 김모 씨는 오는 12월 계약기간 만료를 앞두고 집주인과 전셋값을 5000만원 낮춰 계약서를 다시 쓰기로 합의했다. 김씨는 “전세 시세가 빠지면서 계약 당시보다 저렴한 물건이 우리 단지는 물론 주변 단지에도 수두룩하게 나와 있다”며 “집주인이 거절하면 이사하자는 생각으로 물어봤는데 최근 새 세입자를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더니 집주인도 동의했다”고 전했다.
가을 이사철에 접어들었지만 신규 전세수요가 자취를 감추면서 시장에는 전월세 물건이 적체되고 있다. 이에 전세 가격을 낮추고도 세입자를 구하지 못하는 집주인이 늘면서 ‘역전세난’ 우려까지 확산되는 분위기다. 세입자 우위의 시장이 공고해지다 보니 기존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낮춰주는 조건으로 재계약을 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25일 부동산빅데이터업체 아실에 따르면 이날 기준 서울 아파트 전월세 물건은 총 6만2219건으로 한 달 전(5만4661건)보다 13.8% 증가했다. 특히 전세 물건은 3만9058건으로 4만건 돌파를 앞둔 것으로 파악됐다. 이는 허위 매물 과태료 부과를 시행한 이후 지난 2020년 8월 이후 가장 많은 물량으로 2년 전(8914건)과 비교해 4배를 훌쩍 넘는다.
전세 물건이 쌓이다 보니 가격도 하락세를 이어가고 있다. 한국부동산원 집계 기준 서울 아파트 전셋값은 올해 1월 0.01% 상승을 끝으로 하락 전환해 8월까지 0.72% 떨어졌다. 주간 동향을 기준으로도 지난주 전셋값이 0.16% 내리는 등 이달 들어 3주째 –0.1%대 변동률을 기록하고 있어 9월 전셋값 내림폭은 더욱 확대될 것으로 점쳐진다.
중구의 한 공인중개사무소 관계자는 “매매뿐 아니라 전세도 관망세가 우세하고 조용한 분위기가 계속되고 있다”며 “전세문의는 거의 없고 반전세 또는 월세 문의만 간혹 있어 종전 거래가보다 낮게 물건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업계는 높은 금리와 대출 규제, 계약 갱신 등의 영향으로 세입자 이동 자체가 줄다 보니 전세물건 적체, 가격 약세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특히 대출이자 부담으로 월세 선호가 뚜렷해지면서 전세 세입자는 그야말로 ‘귀한 몸’이 됐다. 시세는 물론 기존 전세 계약금보다도 가격을 낮춰 계약하는 사례가 늘어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셋값 하락세 속에서 집주인이 임대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사고도 늘어나는 추세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 따르면 지난달 전세보증금반환보증보험 사고는 총 511건으로 사고액이 1089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금액과 건수 모두 월간 기준으로 역대 최고치다.
연내 기준금리 추가 인상이 예상되는 데다 매매시장 침체도 이어지고 있어 전셋값 하락 흐름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박원갑 KB국민은행 수석부동산전문위원은 “대출금리 인상과 금융시장 불안 등으로 시장이 얼어붙고 있는데 매매와 전세의 동조화 현상으로 전세가격도 약세가 불가피하다”면서 “최근 1~2년간 전세가격이 크게 올라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와 비교하면 전세가율이, 특히 수도권을 중심으로 높은 편이라 ‘깡통전세’가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