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김지헌·김민지 기자] 미국의 일방적인 반도체 정책, 중국의 기술 추격 여기에 핵심 제품 메모리의 추락 등 ‘K-반도체’를 둘러싼 압박이 더욱 거세지고 있다. 동맹을 강조하던 미국이 ‘돈’ 앞에서 실리를 앞세우는 본색을 드러내 반도체 보조금이 시급한 국내 기업들 부담은 커지고 있다. 미국과 대치 중인 중국은 자국 경쟁력 강화에 사활을 걸어 한국은 더욱 쫓기는 신세가 됐다. 그러는 사이 한국의 ‘수출 효자’ 메모리의 수익성이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어 한국 반도체가 ‘3중고’에 갇혔다는 진단이 제기되고 있다.
▶“반도체 공장 지으려면 미국 이익에 충실해라”…고강도 압박 지속 = 3일 로이터에 따르면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부 장관은 이날 “미국 정부의 자금 지원을 받는 반도체 칩 회사들이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한 환경 검토를 신속하게 진행해야 한다”며 “(기업들이 반도체 공장 지원 자금 조달을 신청할 계획이라면) 이미 컨설턴트와 변호사를 고용하고 환경 평가 절차를 시작했어야 한다”며 압박성 발언을 내놓았다.
앞서 미국 상무부는 지난달 28일 총 520억달러(약 68조원) 규모의 반도체 지원금 중 반도체 공장을 짓는 기업에 지급하는 390억달러(약 51조7000억원)에 대한 신청 절차와 기준을 발표하며 ▷초과수익에 대한 미국과 공유 ▷지원금의 배당·자사주 매입 사용 금지 ▷현금흐름 등 재무 계획서 제출 ▷첨단 칩 공정에 대한 접근 등을 요구한 바 있다.
그런데 이날 미국 내 환경 보호를 위한 조치까지 기업들에 강조하며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산업을 이끄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한층 높은 수준의 부담을 요구한 것이다.
업계에선 이같은 미국 정부의 모습이 급반전이란 평가가 나온다. 2021년 5월만 해도 미국 백악관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현지 투자에 나선 삼성, SK, 현대차, LG 등 한국 기업들을 치켜세우며 연신 “고맙다”는 뜻을 전했다. 지난해 5월에도 국내 삼성 반도체 공장을 방문해 “땡큐 삼성”을 외치면서 양국 간 기술동맹의 굳건함을 강조했고, 지난 7월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미국 투자 발표에도 연신 고맙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불과 1년만에 우호적인 ‘상호 협력’의 기류를 지우고 ‘자국 우선주의’의 본색을 드러냈다는 평가다. 미국 행정부의 중간 평가 성격이 짙은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선전하며 정책 추진에 힘이 실린데다, 미국의 반도체 리더십을 한시라도 빨리 회복하려는 속내가 드러났다는 분석이다. 업계에선 미국 우선주의가 반도체를 넘어 최근 투자가 확대되는 배터리 산업에도 옮겨 붙는 등 향후 파장이 커질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미국의 패권 경쟁에 한국이 피해를 보는 상황이 반복될 수 있단 전망도 나온다. 최근의 국내 기업의 위기감은 미국의 중국에 대한 반도체 경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과거 미국은 1980년대 부상하는 일본을 견제하던 당시에도 한국 경제에 피해를 입힌 적이 있다. 미국은 1988년 슈퍼 301조(교역상대국의 불공정한 무역행위로 미국이 무역에 제약을 받을 경우 광범위한 영역에서 보복할 수 있도록 허용한 미국 통상법)를 도입해, 1986년 첫 경상수지 흑자를 낸 한국 경제에 원화 절상 압박을 받도록 했고, 이 여파로 한국은 1992년 이후 경상수지 적자에 이어 국제통화기금(IMF) 구제 금융까지 받은 전례가 있다.
오정근 한국금융정보통신기술(ICT)융합학회 회장은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다툼으로 인해, 과거 일본 견제용 슈퍼 301조 도입 당시처럼 한국 경제가 피해보는 일이 일어날 수 있어 우려스럽다”고 밝혔다.
▶中 첨단 메모리 투자 강화…한국 메모리 기업들 수익성 ‘눈물’ = 미국이 국내 기업들의 투자에 대한 족쇄를 채우는 와중에 중국은 자국의 메모리 산업 진흥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다.
2일 블룸버그 통신은 중국 기업정보 플랫폼 톈옌차를 인용해 국가집적회로산업투자펀드(일명 대기금)가 중국 최대 메모리반도체 제조업체인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YMTC)에 129억위안(약 2조4000억원) 추가 투자를 계획했으며, 투자 완료일은 지난 1월 31일이었다고 보도했다. 중국이 전세계 반도체 수요 부진과 미국의 수출 통제에 맞서 반도체 산업 투자에 다시 집중하고 있음을 시사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첨단 낸드의 적층 수준인 200단대 제품 생산을 두고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치열한 기술 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 중국 정부의 자국 기업에 대한 조 단위 투자가 진행되면서 국내 업계에 긴장감이 한층 커지고 있다.
나아가 글로벌 메모리 시황 악화가 지속되면서,국내 기업들의 실적 하락 우려도 거세지고 있다. 가격 하락과 과잉 재고는 최고 수준이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전 세계 D램 매출은 122억8100만달러(약 16조원)로, 전 분기보다 32.5% 감소했다. 이는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8년 4분기(-36%)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1월 국내 반도체 재고는 전월보다 28% 급증했다. 이는 1996년 2월(전월대비 41.3%) 이후 최대 수준으로, 27년 만이다. 업계에선 올해 1분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대한 적자를 기정사실화되는 분위기다.
미국과 중국의 경쟁에 발목이 잡히고 시장 악화에 발버둥 치고 있는 국내 반도체 기업들을 위해 정부를 중심으로 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단 분석이 제기된다.
강성진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지금 국내 반도체 기업들의 생사가 걸려있을 정도로 중요한 현안이기 때문에 정부 차원에서 총력전을 펼쳐야 할 때”라며 “칩스법도 미국 정부가 나서서 하는 것인 만큼, 우리 정부도 기업에만 맡겨둘 것이 아니라 외교적으로 해법을 찾기 위해 적극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