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신동윤 기자] 3월 초 벌어졌던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사태 이후 이어진 약(弱)달러 현상으로 글로벌 주요국 통화 가치가 상대적으로 강세를 보이는 가운데서도 원화만큼은 도무지 맥을 추지 못하는 모습이다. 주요 20개국(G20) 중 달러화 대비 통화 가치가 SVB 사태 이후 ‘마이너스(-)’를 기록한 4개국 통화 중에 원화가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장기간 침략 전쟁을 벌이거나 초(超)인플레이션을 겪으며 경제적 고통을 겪고 있는 국가들과 같은 선상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원/달러 환율이 연중 최고 수준을 기록하면서 최근 ‘조정’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코스피·코스닥 시장에도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국내 증시에 대한 투자 매력도가 급격히 떨어짐에 따라 외국인 투자자의 ‘셀 코리아(sell Korea)’ 현상이 발생, 주가 하방 리스크가 확대될 수 있다는 것이다.
G20 중 韓·‘전쟁’ 러·‘초인플레’ 아르헨-튀르키예만 통화 가치 ‘마이너스’
26일 헤럴드경제는 SVB 사태가 발생했던 지난달 10일부터 전날까지 G20 국가들이 통용하는 16개 통화의 달러화 대비 가치 등락률을 분석했다.
이 결과 원화의 달러화 대비 가치 등락률은 -0.60%로 13위에 이름을 올렸다. 원화 아래엔 ‘초인플레이션’ 현상이 발생 중인 아르헨티나 페소화(-10%·16위), 튀르키예 리라화(-2.42%·14위)가 자리 잡았다.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서방 국가들로부터 고강도 경제 제재를 1년 넘게 받고 있는 러시아 루블화(-5.84%·15위)도 원화보다 가치가 더 크게 떨어진 통화였다.
이들 4개국 통화를 제외한 12개 통화 모두 SVB 사태 이후 통화 가치가 ‘플러스(+)’를 기록했다.
이 기간 ‘달러인덱스’는 104.58(3월 10일)에서 101.35(4월 24일)로 3.09% 하락했다. 달러인덱스는 세계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화의 평균 가치를 표시하는 지표다.
달러 약세 현상이 뚜렷한 상황 속에서 전 세계 주요국 통화 가치가 상대적 오름세를 보이던 와중에서도 원화 가치는 달러화보다 더 빠른 속도로 추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출 부진·韓美 금리차 확대·배당 역송금, 원화 약세로 이어져
통상적으로 달러인덱스가 하락하면 원화가 상대적 강세를 보이던 것과 달리 원화 약세가 이어지는 ‘디커플링(역동조화)’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우선 한미간 금리차가 더 확대될 것이란 전망이 원화 약세를 부추기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가 이달 기준금리를 3.50%로 2회 연속 동결한 가운데,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가 다음 달 초 ‘베이비스텝(한 번에 기준금리 0.25%포인트 인상)’을 단행할 것이란 데 무게가 실리고 있다. 한미 금리 역전폭이 기존 1.5%포인트(상단 기준)에서 1.75%포인트로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최제민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최근 시장에 내재된 한미 기준금리차를 비교하면 미국 은행 위기 이후 금리차가 크게 줄었다가 재차 반등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며 “기대 조정이 원화 약세 압력으로 작용하면서 원/달러 환율에 상방 압력을 가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배당 역송금이란 계절적 요인 탓도 있다. 한국 기업들이 주로 4월에 배당금을 지급하면서 외국인 투자자들이 배당금을 달러로 환전해 송금하기 때문이다. 달러 수요가 많아져 환율이 오를 수 있다.
전문가들은 원화 약세의 가장 근본적인 요인으로 수출 중심 경제의 펀더멘털이 약화된 점을 꼽았다. 김찬희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중국 리오프닝(경제 활동 재개)에 따른 회복세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대(對)중국 수출은 지난달 전년대비 30%대 감소세를 보이며 3개월째 대중국 무역적자를 기록했다”고 지적했다. 특히, 반도체 수출 감소가 두드러지며 무역수지 적자폭이 올해 첫 3개월 만에 224억달러에 이르며 작년의 절반에 이르는 수준이라는 점도 환율에 부담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증권가의 분석이다.
특히, 수출 펀더멘털 약화는 ‘2중고’로 작용하고 있단 평가다. 원화 약세에 따른 국내 증시에 대한 외국인 수급 감소 요인인 동시에 국내 증시 종목들의 상승세를 제약하는 가장 큰 이유로 작용한다는 이유에서다.
외국인 수급 부진, 코스피·코스닥 ‘조정’ 심화시킬라
실제로 코스피의 핵심 상승 동력인 외국인 수급에는 원/달러 환율이 이미 영향을 미치는 모양새다. 환율이 오를수록 환차손이 커져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국내 증시 투자 매력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24~25일 이틀간 코스피에서 외국인 투자자들은 249억원 규모로 순매도했다. 삼성전자의 메모리 반도체 감산 발표 전인 이달 첫 주(3~7일)에 외국인 투자자는 높은 환율 부담과 경기 둔화 우려 탓에 코스피에서 2644억원 규모의 자금을 거둬들이기도 했다.
외국인 투자자발 수급 감소가 자칫 증권가를 중심으로 힘이 실리고 있는 ‘조정 장세’에 대한 가속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앞서 2차전지 등 특정 섹터를 중심으로 급등세를 보였던 코스피·코스닥 지수는 지난주부터 낙폭이 커지는 상황이다. 전날 종가 기준 코스피는 2,489.02포인트로 보름 만에 2,500선 아래로 내려왔고, 코스닥 역시 838.71포인트로 장을 마치며 900선이 무너진 지 4거래일 만에 830선까지 내려왔다.
다만, 하반기로 접어들면서 원/달러 환율이 안정세를 보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시각이다. 올해 1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0.3%로 전분기 -0.4%에서 한 분기 만에 ‘플러스’ 성장으로 전환한데다, 중국 경제가 서비스업에서 제조업으로 온기가 확산되며 한국이 수혜를 받을 것이란 전망에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김찬희 연구원은 “원/달러 환율이 2분기 중에는 달러인덱스와 차별화됐던 부분이 정상화되며 1300원 내외 등락 흐름을 이어갈 것”이라며 “하반기엔 달러인덱스와 동조화해 하락할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