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이를 키우는 데 한 마을이 필요하다 [최진영 칼럼]
시니어 선생님과 체험활동을 하고 있는 유아 [한국앙코르커리어 제공]
한 아이를 키우는 데 한 마을이 필요하다 [최진영 칼럼]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속담이 있다.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뜻의 아프리카 속담이다.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지식과 기술뿐 아니라 책으로 배울 수 없는 인성이나 사회성, 사랑, 지혜 등이 필요하다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넓은 의미로 ‘돌봄이 중요하다’는 뜻의 속담일 것이다.

아이는 크게 마을과 학교와 가정을 통해 성장한다. 겹치기도 하지만 각자 다른 기능을 통해 사람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키워낸다.

너무나 당연한 소리 같지만 우리는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다. 마을과 학교와 가정, 이 세 가지 중에 어느 것도 지금의 어른들이 알고 있던 그것이 아니다. 아이를 키우던 마을은 이웃끼리 싸우기도 하지만 화해하고 어려울 때 돕고 같이 잔치하던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에 나오던 마을이다. 남는 반찬을 아이를 통해 이웃에게 보내고 그 아이는 ‘응답’으로 삶은 고구마를 받아왔고 그 과정에서 학교에서 배우지 못하는 것을 배웠을 것이다.

가정 역시 드라마 ‘전원일기’형 대가족이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할아버지, 할머니를 자주 방문하고 친척끼리 명절에 만나는, 자기소개서에 자주 나오는 ‘엄격하신 아버지와 자상하신 어머니’와 함께 형제자매가 있는 가정(家庭)에서 아이가 성장한다고 가정(假定)하고 있다.

1980년대 방영됐던 드라마 ‘호랑이선생님’에서 본 학교를 상상하면서 아이들이 그 안에서 학교폭력도 없고 교권침해도 없이 잘 성장하리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호랑이선생님’과 ‘전원일기’속 이웃들은 응답하지 않는 시대가 돼버렸고 다시 과거로 돌아갈 가능성은 없다.

층간소음으로 다투기나 하고 바로 앞집이 무얼 하는지도 잘 모르는 마을, 촌지나 체벌은 줄었지만 인간미도 사라지고 입시만 남은 학교, 4인 가구가 전체 가구의 16%밖에 되지 않는, 4인 가구라고 하더라도 맞벌이하러 밖에 계신 부모님과 친구를 만나려면 학원에 다녀야 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소는 누가 키우나?’라는 유행어가 있었지만 소보다도 아이는 누가 키우는지 알 수 없는 시대가 돼버린 것이다.

로버트 러바인 하버드대학 교수는 ‘부모는 중요하지 않다’는 저서에서 우리가 믿고 있었던 부모의 양육에 대한 많은 생각이 다 맞지는 않는다고 주장했지만 가정에서의 양육과 교육을 떠나서 지금의 가정은 온전한 돌봄 기능도 이뤄지기 어려운 상태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겠고 다양한 가족 형태나 핵가족 시대에 아이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역할조차 어려운 가정이 많다.

미국 시카고대학 연구에 따르면 이웃에 멘토가 있는 학생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할 가능성이 더 컸다. 펜실베이니아대학 연구원들은 대학 교육을 받은 성인 비율이 높은 이웃과 성장한 학생은 학업성취도가 높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메릴랜드대학 연구원들의 연구에 따르면 사회적 응집력이 큰 마을의 학생은 학교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가질 가능성이 더 컸고 위험한 행동에 참여할 가능성은 작았다. 사회적 응집력이 큰 마을에 사는 아이들이 부모의 교육 수준이나 경제적인 요소를 제외하더라도 대학진학률이 높다는 연구도 있다.

마을과 이웃은 학교의 가용성이나 교육자원에 대한 접근성, 긍정적인 역할모델, 사회적 응집력, 집단적 효능 등의 기능이 있다. 사회적 응집력은 이웃 주민이 느끼는 공유된 정체감과 소속감을 말하고, 집단 효능감은 주민이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함께 일할 수 있다는 믿음을 말한다.

이웃은 학업적 지원, 멘토링 및 역할모델을 제공함으로써 학생들의 교육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아이가 자라는 데에 필요한 가정과 학교와 마을이 제 기능을 못하게 됐고 아이들에게 마을과 가정의 기능을 다시 제공해야 한다면 우선 그 중심은 ‘학교’일 것이다. 가정이나 마을이 예전 형태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맥렐’이라는 단체는 학습과학으로 검증된 학습 6단계를 소개했다. 지금까지의 학습은 왜 공부하는지 영문도 모른 채 강의 듣고 문제 풀고 시험 보는 상황이었고, 잘 따라오는 사람은 살아남고 못 따라오면 ‘수포자’가 된다. 잘 따라온 학생이라도 수능 등 시험이 끝나면 배운 것이 자기 것으로 남지 않는 경우도 많다. 과학적으로 검증된 방식으로 교육을 하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학습 6 단계를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완전히 학습이 되기 위해서는 동기부여나 흥미를 일으키고 새로운 배움에 대한 의지가 생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생 개개인에 맞게 목표 설정을 해야 한다. 자기가 세운 목표를 이룰 때 뇌에서는 도파민이 나오게 되기에 학습 효과가 향상된다.

학습 단계 중 지식전달과 반복과 연습 부분이나 대량 평가 부분은 인간 선생님보다 인공지능이나 기술이 훨씬 잘할 수 있는 영역이다. 이 영역을 기술을 도입해 교사의 일손을 덜어준다면 선생님은 해야 하지만 할 수 없었던 일을 시도하게 된다. 특히 학습의 첫 단계인 학생의 동기부여나 흥미를 일으키기 부분이나 마지막 단계인 실제 생활에 적용해보기나 확장하고 응용하고 창의적인 활동해보기 부분은 인공지능이나 에듀테크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영역이며 사람이 관여해야 하는 영역이다.

학생 한명 한명을 진단하고 이야기 나눠보며 학생의 자아 찾기와 꿈을 발견해줄 수 있다. 학습의 첫 단계는 학습에 관심 갖기다. 학습에 관심을 갖기 위해서는 내가 누군지를 알아야 하고 발견한 나는 어떤 일을 하면 행복할지 꿈을 찾는 것에서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진로나 롤모델을 보여주면 가슴 뛰는 분야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공부는 어려울 수 있겠지만 감당할 용기와 힘이 생길 것이다.

내가 다닌 학교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포함해서 첫날부터 수업을 했다. 가끔 학생들의 요구로 선생님의 첫사랑 이야기로 수업을 건너뛰거나 한 적은 있지만 내가 누구인지, 내 꿈은 무엇인지, 그래서 1년간 나는 학교에서 무엇을 왜 배워야 하는지를 교육과정에서 충분하게 제공된 적은 없다. 인공지능이 지식전달이나 반복 연습, 채점 등에 쓰는 교사의 시간과 노력을 덜어주면 선생님들은 학생들의 흥미를 일으키는 활동을 하게 될 것이다.

맥렐의 6단계는 배운 것을 응용하고 창의적인 활동에 도입해보고 다른 분야로 확장해보는 것이다. 교사는 학생이 배운 삼각함수를 뮤지컬 무대로 만들어보는 데에 활용하거나 사회 수업 때 배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사회적 기업 창업활동을 해보거나 영어나 국어에서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책을 만들어보는 등의 활동을 기획하고 이끌어가는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교사는 지식전달자에서 동기를 유발하는 인플루언서와 학생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디자인해주는 프로듀서로 역할이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 프로듀서와 인플루언서인 교사는 마을의 도움으로 학생들에게 동기 부여를 하고 여러 가지 활동을 만드는 일을 하게 된다면 우리 마을은 다시 한 번 ‘아이를 키우는’ 마을이 될 것이다.

방학이 왜 있는지가 궁금해서 조사해본 적이 있었다. 다소 놀랍게도 방학이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기록은 없었다. ‘옥수수 수확시기에 일손이 부족하다거나 난방비가 부족해 수업을 못했다’는 어른들의 이유로 방학이 필요했다는 기록만이 발견됐다. 비록 어른들 중심적인 방학이었으나 마을에서 옥수수 수확을 하면서 세상도 배우고 지혜도 쌓였겠지만 현재 우리 아이들의 방학은 학교 다닐 때보다 학원을 더 많이 다니는 시기일 뿐이고 부모에게 돌봄에 대한 고민과 늘어난 학원비와 남들이 다해서 안 하면 섭섭한 해외여행에 대한 부담이 늘어나는 시기일 뿐이다.

과거의 방학이 아이들이 어른들을 돕기 위해서 시작됐다면, 이제 어른들이 아이들을 돕기 위해 방학을 사용하면 좋겠다. 교사와 협력해 지자체나 기업들이 함께 방학이나 주말을 또 다른 학교로 만드는 시도를 해야 한다. 기업은 다양한 미래 직업 체험이나 프로젝트 수업을 같이해줄 수도 있을 것이고, 지자체는 은퇴했지만 우리나라 산업화 때의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여전히 왕성한 활동이 가능한 시니어들을 ‘주말학교’나 ‘방학학교’ 멘토로 연결해줄 수 있다. 예전 마을에서는 당연히 있었던 기능이었다.

우리는 지금 돌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때다.

각자 이유는 있겠지만 어쩌면 지식교육보다 더 중요해 보이는 돌봄은 학교에서도 하기 싫어하는 듯하고, 지자체도 어찌해야 할지 몰라 하는 것 같다. 서로 우리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당연히 더 나은 돌봄이 어떤 것인지 미래 돌봄에 대한 연구나 투자, 전문가 양성은 이뤄질 수도 없는 것 같다. 지금 이뤄지고 있는 돌봄은 안전하게 보호한다는 기능만이 작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이야기한 대로 사랑과 자존감, 사회적 응집력이나 집단 효능감 등 마을과 가정이 해주던 역할을 누군가는 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돌봄이 더 많은 기능을 담당해야 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아이를 키우는 새로운 마을을 만드는 ‘미래 돌봄’은 단지 아이들의 교육 성과를 위한 것만이 아니다. 인구가 줄고 있고 인간의 수명은 늘고 있다. 지금의 초등학생·중학생 학부모는 본인들도 영어유치원부터 12년간 학원에 다녀본 ‘학원키즈’가 학부모가 된 최초의 세대다. 가정이나 마을을 통해서 아이 키우는 것을 배우고 도와주는 사람이 많았던 시대가 아니고 그런 경험도 없는 학부모들이다. 집 사기도 힘들어 부부가 같이 일해야 되는 상황에 도와주는 마을 없이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우수한 은퇴 시니어들의 일자리 창출도 가능하고 인구 감소의 한 해결책도 될 수 있는 돌봄을 서로 안 하고 싶어하는 상황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