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 했는데 두산은 발목 잡힌 계열사 간 합병
신고서 제출 여부에 엇갈린 운명
적정 가치 기준 모호, 당국 시가 부정 불가피
[헤럴드경제=심아란 기자] 금융당국이 연초부터 밸류업(기업가치 개선) 프로그램을 추진하는 가운데 SK와 두산의 사업 재편이라는 암초를 만났다. 두 그룹 모두 ‘주가’를 활용해 대주주에 유리한 계열사 간 합병 구조를 설계했다. SK는 저평가, 두산은 고평가 계열사를 이용했다는 차이점을 가진다.
SK는 주주총회를 통과하면서 합병에 다가섰지만 신고서 제출 의무가 발생했던 두산은 금융감독원에 철퇴를 맞고 있다. 금감원은 두산에 고평가는 안 된다는 입장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사실상 당국이 시가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밸류업 프로그램도 딜레마에 빠진 모습이다.
▶SK·두산, 소액주주 주식 지주회사로 이전 효과=SK이노베이션의 SK E&S 흡수합병 작업은 27일 열린 주주총회에서 출석주주의 87.5%의 찬성을 받으며 탄력 받게 됐다. 반면 26일 두산로보틱스는 두산에너빌리티의 투자부문 흡수합병, 두산밥캣과 포괄적주식교환을 추진하던 중 금감원으로부터 정정신고서 제출을 통보 받았다. 이번이 두 번째다.
이들 두 건의 합병은 소액주주의 주식을 지주회사에 이전한다는 점에서 대동소이하다. SK㈜의 경우 합병 전 SK이노베이션 지분은 36%였으나 합병 후 56%까지 높아진다. ㈜두산은 두산밥캣 주식소유비율이 13.8%에 그치지만 이를 두산로보틱스의 완전자회사로 편입을 추진하고 있다. 이 경우 ㈜두산은 두산로보틱스 주식 소유 비율 42%를 통해 두산밥캣 지배력을 높이게 된다.
SK이노베이션은 적자 자회사 SK온을 지원하기 위해 SK E&S를 동원한 점, 두산은 현금창출력이 뛰어난 두산밥캣 지배력을 높였다는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다. 두 곳 모두 사업 영역이 확연히 다른 계열사를 합치는 만큼 시너지 역시 뚜렷하지 않다.
상법, 자본시장법이라는 법률적 틀 안에서 불법 요소는 없으나 모든 주주의 이익을 대변했다고 볼 수 없는 의사결정이다. 금융당국이 코리아 디스카운트(국내 주식 저평가)를 해소하고자 상장사 밸류업에 공들이는 기조에도 반대되는 행보다.
개인주주 입장에서는 어느 종목에 투자해도 결국 이익은 대주주로 귀결된다는 경험이 추가되는 상황이다. SK이노베이션의 2대주주인 국민연금은 주주가치를 훼손한다는 점에서 SK E&S와의 합병안에 반대 의결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저평가는 했는데 고평가 지적 불가피한 금감원의 딜레마=SK와 두산 모두 시가를 활용해 합병비율을 산정했다. SK이노베이션은 주가순자산비율(PBR)이 0.36배로 저평가 상태였다. 두산로보틱스는 PBR이 13배로 고평가된 시점인 반면 두산밥캣 PBR은 0.8배로 본질가치보다 시가가 낮았다. 저평가와 고평가를 활용해 양사 모두 지배주주가 그룹 내 알짜 회사의 의결권 지분을 높이는 효과를 도출했다.
SK는 합병 성공 가능성에 다가섰다. 신고서 제출 의무에서 면제되면서 금감원의 레이더를 피한 점이 주효했다. 비상장사인 SK E&S의 주식 분산도가 낮아 SK이노베이션의 합병신주 발행 대상이 SK㈜ 정도였다. 증권의 발행 및 공시 등에 관한 규정상 신고서를 제출할 필요가 없었다. 합병은 주주총회에서 결정되는 사안이므로 금감원이 지적할 명분은 약했다.
반면 두산은 상장 계열사 간 합병과 포괄적 주식교환을 추진하면서 금감원 영향력에 노출됐다. 상장사인만큼 다양한 주주에게 주식이 분포돼 있고 신고서 제출 의무가 발생했다. 신고서 점검은 금감원의 고유 업무 중 하나다.
그 결과 금감원은 저평가 시기를 포착한 SK는 지켜보고 고평가를 활용하려는 두산에 압박 수위를 높인 상태다. 밸류업은 중요하지만 본질가치 대비 높게 형성된 시가는 공정하지 않다는 시그널을 보내는 상황이다.
당국은 밸류업 기준에 미달한 상장사는 증시 퇴출 가능성까지 외친 시점에 고평가를 경계하는 아이러니에 놓여 있다. 상장사의 적정 가치에 대한 합의점을 도출하기 어렵고 고평가에 대한 정의도 모호한 점이 한계다.
금감원이 합병 가격에 간접적으로 개입하는 상황에서 두산도 입장 정리는 필요해졌다. 만약 두산로보틱스 평가가치를 하향조정해 합병비율을 재산정하면 두산로보틱스 주주들 입장도 무시할 수는 없다. 두산로보틱스는 로봇주 열풍을 타고 작년 말 PBR이 18배에 육박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