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했던 2026 북중미 월드컵의 기억을 뒤로 하고 ‘모레노호’의 깃발을 단 한국 축구가 바꾼 것은 수비 숫자 하나였다. 결과는 ‘홍명보호’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로베르트 모레노 임시 감독이 이끄는 축구 국가대표팀(FIFA 랭킹 32위)은 24일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에콰도르(25위)와의 친선경기에서 3-0으로 이겼다. 후반 9분 오현규(베식타시), 13분 손흥민(LAFC), 41분 이동경(울산)이 잇따라 골을 넣었다. 양 팀 합쳐 옐로카드가 9장(한국 4장, 에콰도르 5장)이나 나온 거친 경기였지만, 한국은 큰 실점 위기 없이 무실점으로 마쳤다. 2026 북중미 월드컵 부진 뒤 처음 치른 A매치에서 결과보다 더 눈에 띈 것은 경기 방식의 변화다.
경기 뒤 대표팀 수비의 중심 김민재(바이에른 뮌헨)는 “확실히 팀 선수들이 포백을 쓰니까 좀 더 편하게 했다. 재밌었다”며 웃었다.
스리백 대신 ‘기본형’ 4-4-2…간격이 살아났다
홍명보 전 감독 체제의 대표팀은 월드컵 본선에서 스리백을 고집하다 쓴맛을 봤다. 모레노 감독은 취임하면서 “K리그에서 널리 쓰이고 국제 무대에서도 유용한 4-4-2가 기본”이라고 밝혔고, 소집 훈련 내내 이 대형을 다듬었다.
손흥민·오현규가 투톱에 서고 이재성(마인츠)·박진섭(저장)이 중원을 맡았다. 송민규(나시오날)와 정승원(서울)이 좌우 측면에 섰다. 수비는 조현택(울산)·김민재·이한범(브루게)·설영우(아우크스부르크)의 포백이었고, 골문은 김승규(도쿄)가 지켰다.
가장 달라진 것은 선수 사이의 간격이었다. 수비형 미드필더 라인부터 최전방까지 간격을 좁게 유지하며 강하게 압박했다. 공수가 바뀌는 순간에도 대형이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오현규가 측면으로 빠지면 정승원이 가운데로 들어오는 식의 자리 바꾸기도 상대를 흔들었다.
센터백에게 준 첫 옵션은 ‘전진 패스’
포백 전환은 센터백의 역할도 바꿨다. 김민재에 따르면 모레노 감독은 경기 전 센터백들에게 “공간이 있으면 치고 올라가라”고 주문했다. 그는 “전진 패스를 많이 하라고 요구하셨다. 첫 번째 옵션이 전진 패스였다”며 “생각보다 공간이 많았다. 한범이와 제가 그 공간을 활용해 플레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주문은 선제골로 이어졌다. 후반 9분 김민재가 과감하게 올라가 송민규에게 전진 패스를 넣었고, 송민규는 곧바로 앞으로 뛰어드는 오현규에게 연결했다. 오현규는 수비수 2명을 달고 페널티아크까지 치고 들어가 중거리 슈팅으로 마무리했다. 수비 라인에서 시작해 패스 두 번 만에 골이 됐다. 센터백을 공격의 출발점으로 쓰겠다는 모레노 감독의 구상이 그대로 드러난 장면이다.
전반의 한계 극복한 ‘작은 조정’
전반은 답답했다. 수비 라인부터 공을 돌리며 빈틈을 찾으려 했지만 호흡이 맞지 않았고, 측면 공격도 날카롭지 않았다. 역습을 당할 때는 공격수들이 늦게 내려와 순간적으로 수적 열세에 몰렸다. 전반 유효 슈팅은 1개뿐이었다.
모레노 감독은 선수를 바꾸거나 대형을 뜯어고치지 않았다. 대신 선수들의 위치를 손봤다. 김민재는 “(감독이) 풀백들에게 조금 더 앞으로 나가서 하라고 했다. 전반전에는 풀백들이 처져 있었다”고 전했다. 압박을 시작하는 위치도 조정했다. 모레노 감독은 “하프타임에 몇 가지 작은 조정을 했다. 특히 압박 방식과 후방 빌드업에서 공간을 더 잘 찾도록 했다”며 “우리 구조를 유지하면서 상대 공격에 흔들리지 않게 했고, 그다음엔 선수들의 재능이 차이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분위기가 오르자 세트피스에서도 골이 나왔다. 후반 13분 손흥민이 페널티지역 왼쪽에서 직접 프리킥으로 추가골을 넣었는데, 키커를 권한 사람이 김민재였다. 그는 “큰 선수들은 문전에 붙자고 하고, 흥민이 형에게 ‘한 번 때리세요’ 했다”며 “확률은 낮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잘 차서 머쓱하더라”고 웃었다. 후반 3골은 역습, 세트피스, 지공(천천히 공을 돌리며 푸는 공격)으로 각각 다른 경로에서 나왔다.
‘욕받이’ 설영우의 반전, 구조적 변화의 증거
하프타임 조정의 효과가 가장 잘 보인 곳은 측면 수비였다. 월드컵에서 비판이 몰렸던 설영우는 이날 호평을 받았다. 후반 25분 동료의 실수로 맞은 실점 위기에서는 후안 앙굴로의 슈팅을 몸으로 막아냈다. 후반 교체 투입된 이태석도 왼쪽 공격에서 여러 차례 좋은 기회를 만들었다.
이전 대표팀에서는 공격이 막히면 공이 겉돌다 결국 풀백에게 넘어갔고, 측면에 고립된 풀백이 실수를 떠안는 장면이 반복됐다. 풀백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팀 공격 구조가 만든 결과였다는 지적이다. 풀백을 앞으로 올리고 조직적인 공격이 살아나자 같은 선수들의 경기력도 함께 좋아졌다.
한 경기로 속단은 이르다
냉정하게 볼 대목도 있다. 후반 경기력이 나아진 데는 에콰도르 선수들의 체력 저하도 영향을 줬다. 전반에 드러난 공수 전환 때의 수비 가담 문제와 새 조합의 호흡도 과제로 남아 있다. 김민재도 “아직 맞춘 지 얼마 안 됐다. (조)현택이도 우리와 처음 맞춰봐서 어색한 부분이 있었다”며 “다음 경기에서 나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전반 계획이 통하지 않자 곧바로 수정했고, 선수 개인 능력보다 팀 전체의 움직임으로 문제를 풀려 했다는 점은 이전 체제와 분명히 달랐다. 개인 능력에 기대던 ‘해줘 축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첫 신호다.
모레노 감독에게 주어진 경기는 6경기다. 대표팀은 다음으로 우루과이, 베네수엘라, 우즈베키스탄을 차례로 만난다. 성향이 다른 상대에게도 4-4-2의 간격과 센터백 전진, 하프타임 대응이 통할지가 모레노호의 진짜 시험대다.
why37@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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