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가을 드라마는 로맨스의 변주
사랑에 첩보 얹고 공학 비벼 진화
‘멜로 사절’ 메스 든 김지원 ‘주목’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우리 그냥 사랑하게 해주세요!”
이런 애원은 이제 뒤안길로 사라진 지 오래다. 올가을 안방극장의 주인공들은 안온한 카페에서 눈 맞춤 하는 대신, 총칼이 난무하는 경성 한복판에서 몸을 구르고, 기름때 묻은 로봇 연구실에서 밤을 새우며, 메스를 들고 병원 카르텔의 멱살을 잡는다.
달달하기만 한 설탕물 멜로에 질린 시청자들을 위해 방송가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플랫폼이 제대로 판을 갈아엎었다. 로맨스의 복잡다단한 변주가 시작된 것이다. 로맨스를 바탕에 두되, 그 위로 ‘첩보·공학·SF·누아르’라는 맛깔난 양념을 사정없이 끼얹었다. 이토록 화려한 ‘장르 뷔페’의 중심에 잘 자란 20대 투톱 배우 김유정·김소현, 멜로를 과감히 배반한 김지원·서현진이 등판한다.
올가을 드라마의 핵심 키워드는 ‘관계성의 진화’다. 더 이상 순도 100%의 멜로만으로는 도파민에 절여진 시청자들의 눈높이를 맞출 수 없다. 일제강점기 첩보전의 흙바닥, 살벌한 대학원 연구실, 찌릿한 물리적 생존의 현장, 서슬 퍼런 수술실과 취조실이라는 극한의 시공간에 던져질 때 비로소 인물들의 감정은 가장 뜨거운 스파크를 튀긴다.
소매치기 밀정과 공학도의 반란…김유정·김소현의 ‘짜릿한 탈선’
아역 시절부터 전 국민의 ‘랜선 조카’로 자란 동갑내기 배우 김유정과 김소현이 오랜만에 나란히 등판한다.
김유정은 오는 10일 첫 방송 되는 tvN ‘100일의 거짓말’에서 경성 최고의 소매치기이자 독립군 밀정 이가경으로 날아다닌다. 조선총독부의 엘리트 통역관 김태웅(박진영 분)과 얽히며 펼치는 첩보 로맨스다. 꽃가마 타던 ‘사극 요정’이 손기술 화려한 밀정이 돼 적의 심장부로 다이빙한다.
김유정은 지난 29일 서울 용산에서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가경도 자신이 어떤 꿈을 꿔야 할지 모르는 어린 존재이고, 태웅 역시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는 인물이다. 둘이 만나 서로를 느끼며 함께 성장하는 로맨스”라며 “혼자 만들어가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는데 현장에서 눈만 봐도 통하는 게 있었다”고 말했다.
‘100일의 거짓말’은 1932년 일제강점기 경성을 배경으로 한다. 두 청춘의 로맨스에 항일 무장단체 구국단과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사이의 대립 구도 및 시대상이 드라마를 관통하는 핵심 요소다.
연출을 맡은 유인식 감독은 “작품은 뜨겁고 숭고한 대의를 다루고 있지만, 각 인물을 따라가다 보면 첩보, 멜로 등 흥미롭고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가득 준비돼 있다”고 귀띔했다.
김소현은 5일 베일을 벗는 ENA ‘연애박사’에서 캠퍼스의 핑크빛 낭만을 싹 걷어냈다. 한쪽 다리를 잃은 박사과정생(추영우 분)과 함께 대학원 연구실 구석에서 기름때를 묻히는 석사과정생 유진으로 변신한다. ‘논문 패스’와 ‘취업 난민’이라는 살벌한 현실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은 고단한 청춘들의 끈끈한 ‘전우애’다. 작품은 지난 8월 세상을 떠난 안판석 감독의 유작이다. 안 감독의 극사실주의적 앵글 위에서 김소현은 가장 현실적인 청춘의 민낯을 덤덤하게 길어 올렸다.
극본은 ‘옥탑방 고양이’, ‘풀하우스’의 민효정 작가가 썼다. 민 작가는 “명문대 대학원생들이 주인공인 로맨스 드라마로, 연애를 잘 모르는 박사들의 환희와 절망이 바로 우리 드라마의 매력과 재미”라며 “실패가 두려워 도전도 못 하고 내일의 불행을 걱정하며 오늘의 행복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존재들의 지극히 현실적인 일상의 이야기와 로맨스에 울고 웃게 될 것”이라고 작품을 설명했다.
로맨스의 상상력은 물리적 법칙마저 갈아치운다. 넷플릭스에서 공개될 채수빈의 ‘나를 충전해줘’는 도파민 충전 로맨틱 코미디의 끝판왕이다. 동명의 웹소설을 옮겨온 작품이다.
인공심장 배터리가 닳으면 생명이 간당간당해지는 시한부 재벌 3세(김영광 분)와 몸에 전기가 흘러 손만 대면 상대를 감전시키는 작가(채수빈 분). 손끝만 스쳐도 찌릿찌릿한 물리적 위기 상황을 코믹하게 버무리며, ‘죽어야 사는 남자’와 ‘닿으면 죽이는 여자’의 강제 밀착 생존기를 그린다. 닳고 닳은 ‘운명적 만남’이란 클리셰를 물리 법칙으로 박살 낸 재기발랄함이 돋보인다.
‘멜로 사절’ 메스 든 김지원, 10년 만에 만난 서현진-유연석
‘핑크빛 로맨스’가 전부는 아니다. 한때 ‘로코 퀸’ 타이틀을 달고 다닌 김지원과 서현진은 아예 멜로의 껍질을 산산조각 내며 맞불을 놨다.
김지원은 9일 출격하는 SBS 금토극 ‘닥터X: 하얀 마피아의 시대’에서 거대 병원의 권력 카르텔을 메스로 찢어발기는 천재 외과의 계수정으로 흑화했다. 사랑 타령 대신 손현주·이정은 등 관록의 거물들과 피 튀기는 권력 암투를 벌이며 차가운 ‘메디컬 누아르’의 독보적 다크히어로로 우뚝 설 태세다.
‘닥터 엑스’는 일본 아사히TV에서 방영된 드라마 ‘닥터 엑스: 외과의 다이몬 미치코’를 원작으로 삼은 리메이크물이다. 천재 외과의 다이몬 미치코의 맹활약을 다루며 무려 시즌 7까지 이어진 인기 드라마다. 당시 “실패하지 않아요”라는 대사가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이 대사는 김지원의 입을 통해 듣게 된다.
‘닥터X’를 연출한 이정림 감독은 “김지원은 수술실에서의 압도적인 모습과 수술실 밖에서 엉뚱하고 인간적인 계수정의 큰 간극을 설득력 있게 오갔다. 김지원이 아닌 계수정은 상상하기 어려웠다”며 “수술 장면의 경우 현장 자문을 오신 의사 선생님들이 박수를 쳤을 정도”라고 극찬했다.
서현진이 선택한 MBC ‘라이어’는 대중의 기대를 배반한다. 2016년 ‘낭만닥터 김사부’에서 안방극장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던 유연석과 서현진이 10년 만에 재회했지만, 두 사람의 손에 들린 건 꽃다발이 아닌 ‘의심의 칼날’이다. 단 하나의 기억을 두고 “네가 거짓말쟁이”라며 서로의 숨통을 죄는 심리 스릴러로 만난 것이다. 낭만을 지운 자리에 들어선 긴장감이 시청자의 마음을 훔친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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