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레 미용실’ 연출 정의신 등 인터뷰

1960년대 日 규슈 탄광촌 ‘아리랑 고개’

“거대한 역사 속 소시민 희로애락은 위대”

연극 ‘스미레 미용실’ 배우 서동갑, 정의신 연출가, 배우 최지연 [세종문화회관 제공]
연극 ‘스미레 미용실’ 배우 서동갑, 정의신 연출가, 배우 최지연 [세종문화회관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시계를 거꾸로 돌린 듯한 목조 건물. 1960년대 일본 규슈 탄광촌 ‘아리랑 고개’에 수미네 이발소가 있다. 제비꽃을 닮아 꿋꿋한 수미는 자신의 이름을 딴 미용실을 꿈꾸지만, 그의 이발소엔 한 번에 한 사람의 머리만 할 수 있는 빨간 의자 하나만 덩그러니 자리한다.

가게의 절반을 차지하는 평상 위엔 아버지가 온종일 누워 있다. 가스 중독 후유증으로 밤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남편, 같은 참사에 나이도 이름도 잊어가는 제 남편을 애지중지 돌보는 여동생의 고단함이 휘몰아친다. 기쁜 날보단 슬픈 날이 많아도 수미는 “내일은 더 좋은 일이 기다릴 것”이라 믿으며 오늘을 산다. 비극의 밑바닥에서도 기어코 불을 지펴 밥을 짓고 흩어진 머리를 빗겨 올린다. 가슴 한쪽에 ‘포마드 냄새 대신 이발소 향기가 나는 미용실’ 스미레(제비꽃이라는 뜻의 일본어)를 품은 채.

“더 밝게, 더 강하게!”

연극 ‘스미레 미용실’(10월 3일까지, 세종문화회관)의 연출가 정의신은 이 작품이 한국 무대에 오르는 2~3달의 연습 기간에 수미 역을 맡은 배우 최지연에게 숱하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수미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자리에 꿋꿋하게 서 있는 여성이라고 생각했어요. 하나하나에 흔들리거나 슬퍼하며 감정에 휘둘리는 게 아니라, 풍파 속에서도 어떻게 살아갈지를 스스로 개척해 가는 여성이요.” (정의신)

공연에 한창인 정의신 연출가와 두 주연 배우 최지연·서동갑은 최근 헤럴드경제와 만나 “역사의 풍파 속에서도 서로의 손을 놓지 않고 제자리를 지켜낸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싶었다”고 했다.

연극 ‘스미레 미용실’ [세종문화회관 제공]
연극 ‘스미레 미용실’ [세종문화회관 제공]

“대문자 역사엔 관심이 덜 가요”…그가 국적을 지키는 이유

1950년대 한센병 요양소를 배경으로 한 ‘이를테면 들에 피는 꽃처럼’(2007), 1970년대 오사카를 다룬 ‘야끼니꾸 드래곤’(2008) 그리고 1965년 규슈 탄광촌을 무대로 삼은 ‘스미레 미용실’.

이 세 작품은 이른바 ‘재일 코리안’ 3부작으로 불린다. 이름 앞에 언제나 ‘재일 한국인’이란 수사가 붙는 연출가 정의신의 작품이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그는 공연과 영화를 아우르며 예술세계를 구축한 거장이다. 현지에선 예술, 문화 훈·포장인 자수 포장까지 받았다. 그럼에도 정 연출가는 여전히 대한민국 국적을 고수하며 재일 한국인의 이야기를 한다.

“한국 국적을 지키는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 할머니의 영향이 커요. 이제 와서 일본 국적을 취득해 일본인이 될 생각은 없어요. 제가 한국에서 나고 자란 순수한 한국인은 아니지만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가 한국인이니 그것을 부정하고 싶지 않아요.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죠.” (정의신)

정 연출가의 작품이 늘 재일 한국인의 삶을 향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에게 부모 세대부터 걸어온 삶과 정체성은 작품 안에서 짙게 빚어진다. 한국 초연작인 ‘스미레 미용실’은 엄혹한 시대의 역사가 개인의 삶에 실핏줄처럼 이어진다.

‘스미레 미용실’은 1963년 미이케 탄광 폭발로 터전이 부서진 재일교포들의 생존기로 연극을 채색한다. 그의 시선은 국가나 권력이 주도하는 거대 서사에 주목하기보다 비극에 비극이 더해져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끈질긴 일상의 활기로 향한다. 정 연출가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는 아주 작다”며 “하지만 그 작은 인간들이 역사의 파도 속에서 필사적으로 싸워 나가는 모습은 위대하다”고 말했다.

연극 ‘스미레 미용실’ 배우 서동갑, 정의신 연출가, 배우 최지연 [세종문화회관 제공]
연극 ‘스미레 미용실’ 배우 서동갑, 정의신 연출가, 배우 최지연 [세종문화회관 제공]

“대문자 역사에는 관심이 가질 않아요. 소소한 인간의 삶이 역사 속에서 생겨났다가 지워져 가는 것, 원래라면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을 작은 ‘재일 이야기’, 그 소소함 속에 인생의 희노애락이 있는 이야기를 쓰는 것 같아요.” (정의신)

연극은 탄광촌을 발로 뛰며 채취한 실화를 무대에 고스란히 얹었다. 정 연출가는 규수 탄광촌에서 만난 사람들 속에서 수미의 원형을 발견했다.

“일산화탄소 중독 환자가 된 남편을 그 여성이 계속 돌봤어요. 그는 밤이면 발작하고 날뛰는 남편에게 담요를 덮어씌우고 두 딸을 데리고 밤새 걸었다고 해요. 그런데 그 얘기를 청승맞고 슬프게 하는 게 아니라, 담담하게 오히려 옛날이야기를 하듯 하셨어요. 그게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정의신)

그 만남은 ‘스미레 미용실’ 속 수미를 만들고, 곳곳에 대사로 살아났다. 수미의 남편 나루히로와 하루미(수미 여동생)의 남편 쇼헤이를 통해서다. 뇌 손상 환자가 무의식중에 내뱉던 ‘회전만두’ 같은 알 수 없는 파편들은 무대 위 리얼리티의 뼈대로 세워졌다.

정 연출가는 “한국 관객뿐 아니라 일본인도 무슨 뜻인지 모르는 말이지만, 실제 환자가 직접 뱉었던 언어가 지닌 설득력을 믿고 그대로 남겨뒀다”고 담담히 들려줬다.

195쪽 대본과 찰나의 웃음… 신파를 버려라

배우들의 첫 만남은 지난 7월 29일. 무려 195쪽에 달하는 대본과 압도적인 대사량에 모두 고개를 저었다.

“배우들은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는데도 첫 리딩 때 모든 대사를 전부 다 외워 왔어요. 전 그날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런 연출가, 한국에선 들어본 적 없으시죠? (웃음)” (최지연)

연극 ‘스미레 미용실’ [세종문화회관 제공]
연극 ‘스미레 미용실’ [세종문화회관 제공]

연습실의 담금질은 지독했다. 다음 날 두 번째 연습. 배우들의 손에서 대본이 사라졌다. 곧장 동선 연습으로 들어가며 모두가 1960년대 규슈 탄광촌으로 향한 것이다.

정 연출가의 무대는 놀랍도록 치밀하고 정교하다. 배우들은 한 치의 오차 없이 각자의 자리에서 오롯이 그 인물로 ‘빙의’한다. 백스테이지에서 그는 ‘집요한 연출가’로 정평이 나 있다. 자신도 “아마도 아시아, 어쩌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집요한 연출가”라고 말하곤 한다. 그가 자신을 첫 번째로 꼽지 않은 것은 “어딘가 존재할 1순위 집요한 연출가”를 위해 자리를 비워둔 것이다. 나루히로를 연기한 서동갑은 “아마 첫 번째는 ‘작가 정의신’일 것”이라며 웃었다.

작품에 돌입하며 정 연출가는 배우들에게 “매 공연을 마치고 매일 코멘트를 하겠다”고 말했다. 서동갑은 “매일 밤 잠꼬대를 할 정도로 연출님의 코멘트를 듣고 있다”고 귀띔했다.

주인공 수미는 이 작품의 심장이다. 최지연은 연습이 끝날 때마다 “노트에는 늘 ‘슬퍼, 아직도 슬퍼, 우울해’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고 고백했다. 사실 첫 리딩 때부터 그랬다. 그는 “작품에 너무 빠져있었는지 한국적인 정서로 너무 슬프게만 대사를 읽었는데, 지금 공연과 그때의 감정은 완전히 다르다”고 했다.

정 연출이 요구한 것은 처절한 눈물과 비극적 슬픔이 아니었다. 그는 ‘존재의 힘’을 강조했다. ‘수미네 이발소’의 절반을 차지한 평상을 점령한 사람은 이곳의 터줏대감인 홍길이다.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안고 일본에 살면서도 조선 적(籍)을 놓지 않는 수미의 아버지다. 홍길을 연기하는 전무송은 대사도 별로 없지만, 존재만으로 극의 중심을 잡는다. 몇 줄 되지 않는 대사에선 묵직한 연륜이 빛을 발한다. 정 연출가는 “전무송 선생님을 보면 알 수 있듯 배우는 많은 걸 하지 않아도 기교를 부리기보다 그 자리에 묵직하게 존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연극 ‘스미레 미용실’  [세종문화회관 제공]
연극 ‘스미레 미용실’ [세종문화회관 제공]

‘밝게, 강하게’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최지연은 “대사마다 다른 ‘밝게’의 온도를 맞추느라 고투했다”며 “소리를 지르고 눈을 부릅뜬다고 강해지는 게 아니라는 벽을 깨는 과정이었다”고 돌아봤다.

정 연출가가 특히 ‘엄격하게’ 다그친 지점은 ‘웃음’이었다. 그의 무대는 유머와 웃음이 넘치지만, 연출가는 ‘웃음’에 관대하지 않다.

“웃음에는 기본이 있어요. 웃음 사이의 간격(間), 즉 ‘마’를 어떻게 잡느냐, 템포와 리듬, 그 공간을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한 요소예요. 가끔 머리로 생각하는 배우가 많아요. 최지연·서동갑 배우도 머리로 생각을 많이 해 어색해지는 거예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관객을 웃기겠다는 탐욕스러운 마음이 필요해요.” (정의신)

최지연이 “개그를 하고 싶다”고 해서 대본 속 개그 분량을 늘렸다가 원상복귀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정 연출가는 “역시 서툴러 보였다”며 웃었다. 서동갑에게도 유머 섞인 장면은 고심이 깊었다. 그는 “한국 배우들은 대부분 감정에 깊이 파고드는 경향이 있다”며 “연출님은 ‘장례식장에서도 웃긴 걸 보면 웃음이 나오지 않느냐’며 즉각적인 일상의 전환을 요구하셨다”고 회고했다.

집요하고 치밀한 연출, 무대 위 완벽주의자로 정평이 나 있지만, 그의 무대가 특별한 것은 이 모든 과정이 앙상블로 어우러진다는 것이다. 최지연은 “연출님은 목표점만 줄 뿐, 그곳으로 향하는 과정까지 쪼는 분은 아니다. 배우가 어떤 동선을 쓰든 그 과정을 찾아가는 걸 즐거워한다. 고통스러운 작업이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대신 한 번 도달한 것을 확인하면 그 이후 같은 것이 나오지 않을 경우 ‘오늘은 왜 약했냐’며 지적한다”며 귀띔했다. 정의신 연출가의 집요함은 끊임없이 외치는 ‘다시, 또다시’에 있다.

“여러 번 ‘다시’를 외치는 것은 배우가 하는 연기가 배우 자신에게도 자연스럽고, 제 눈에도 자연스러워 보여야 하기 때문이에요. 그것이 제 잣대라 정말 옳은지는 모르겠어요. 다만 제 감성을 믿고 때론 배우와 이야기를 나누며 만들어가죠. 그것이 저의 스타일일 수 있지만, 작품 안에서 모두가 각자의 스타일로 만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정의신)

연극 ‘스미레 미용실’ 배우 최지연, 정의신 연출가, 배우 서동갑 (왼쪽부터) [세종문화회관 제공]
연극 ‘스미레 미용실’ 배우 최지연, 정의신 연출가, 배우 서동갑 (왼쪽부터) [세종문화회관 제공]

부서진 삶 위로 피어난 ‘스미레’…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엉망이 돼버렸어.” (나루히로의 대사 중)

비극은 하나만 오지 않는다. 모든 것은 한꺼번에 온다. 탄광 사고로 마을 사람들과 가족의 삶은 무너졌다. 사고로 만신창이가 된 중증 가스 중독 환자인 쇼헤이와 그를 돌보는 하루미, 막장 붕괴로 다리를 잃고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재일 조선인 북송사업으로 떠나려는 히데히로(나루히로 동생)…. 서동갑은 “대사들을 뱉을 때마다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고 했다.

‘스미레 미용실’을 만나며 배우들은 잘 몰랐던 역사를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꿋꿋하게 견뎌온 소시민의 삶을 체화한다. 최지연은 “연출님의 작품 중 산업재해, 노동, 쟁의 이야기가 일상과 물려있는 ‘스미레 미용실’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평범한 사람들은 원치 않는 참사에 휘말릴 때 직접 나서지 않으면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요. 세월호, 이태원 참사, 가습기 살균제도 그렇잖아요. 가족에게 벌어진 일이 아니라면 동시대 사람들은 먼 이야기라며 관심을 두지 않는데 연출님은 수미처럼 꿋꿋하게 이 얘기를 계속하세요. 짧은 기간이나마 그 인물로 살며 한 시대에 푹 들어갔다 나올 수 있었어요. 이 작품을 통해 저도 많이 바뀌었어요.” (최지연)

연극은 바로 그들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를 길어 올린다. 특정 시대와 역사를 무대에 올렸지만, ‘스미레 미용실’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의 이야기는 ‘재일(在日)’의 역사이면서, 이민자의 이야기이며 경계에 선 모든 사람들, 특히 중심에서 비켜난 소시민의 이야기다. 모든 비극이 할퀴고 간 자리, 무대는 다시 또 희망을 품고 눈꽃이 휘날린다.

최지연은 “수미는 아무도 몰라보는 평범한 소시민이지만, 가족과 이웃을 묵묵히 지켜내는 너무나 아름다운 사람”이라며 “그 숭고함이 동시대 관객에게 닿기를 바란다”고 했다. 서동갑은 “목숨이 낙엽처럼 흩어지던 시절에도 사람들은 살아가려 한다”며 “너무 많은 것을 가진 지금은 오히려 살아갈 이유를 잃는 경우가 많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모습만으로 감동이 올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배우들의 바람만큼 연출가의 기대는 거창하지 않았다.

“이미 관객에게 건넨 모든 대사는 제 손을 떠났습니다. 먼 외국의 남이 아니라 바로 옆에 사는 이웃의 이야기로 닿는다면 좋겠습니다. 내일은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이니까요.” (정의신)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