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 구조적 차별의 돌파구] ①

경단 여성 4명이 털어놓은 재취업 현실

40곳 넘게 이력서 내도 취업까지 험난

소득·연금 공백에 경제적 독립도 흔들

[편집자 주] 국내 노인의 소득 빈곤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2.7배에 달한다. 특히 남성보다, 여성 노인의 삶은 더 곤궁하다. 여성 노인들은 오랜 시간 ‘가족 돌봄’에 헌신하길 요구받았고 집 밖에서의 경력을 내려놔야 했다. 이 경력 단절은 그들에게 직업인으로서 존재감을 옅게 만들었고 경제적 자립을 어렵게 했다. 나이 든 그들은 매일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다. 헤럴드경제는 여성 노인의 젊은 시절 헌신이, 시간이 지나 가난과 불안으로 ‘청구’되는 구조를 조명했다.

육아로 인해 경력 단절을 겪는 30~40대 여성의 모습. [AI로 제작]
육아로 인해 경력 단절을 겪는 30~40대 여성의 모습. [AI로 제작]

[헤럴드경제=정주원 기자] “경제적인 것보다 제가 아무에게도 필요 없는 사람이 될까 봐 그게 더 무서웠어요.”

김정남(46) 씨는 오늘도 병원 검진을 받으러 간다. 몸이 아픈 날이 늘면서 노후를 생각하는 일도 잦아졌다. 두 아이를 키우느라 13년간 일을 쉬었던 김씨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돈만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자라 엄마의 손이 덜 필요해졌지만 정작 자신은 사회로 돌아가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김씨는 “사회에도 못 나가고 집에서도 필요 없는 사람이 되면 스스로 자존감이 많이 낮아질 것 같았다”고 말했다.

김정남(46) 씨는 육아로 13년간 경력 단절 이후 2년의 재취업 기간을 거쳐 현재 직업상담사로 근무 중이다. 사진은 김씨가 직업 상담을 진행하는 모습. [독자 제공]
김정남(46) 씨는 육아로 13년간 경력 단절 이후 2년의 재취업 기간을 거쳐 현재 직업상담사로 근무 중이다. 사진은 김씨가 직업 상담을 진행하는 모습. [독자 제공]

육아로 경력이 끊긴 여성들이 마주하는 위기는 저마다 달랐다. 다시 사회에 나갈 수 있을지 두려워하거나 10년 넘게 비어버린 이력서 앞에서 주저앉기도 했다. 자신의 소득과 노후 자산이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실감한 여성도 있었다. 출발점은 결혼·출산·육아로 비슷했지만 끝은 ‘나이 들어서도 이렇게 살아야 하나’라는 공통된 불안이 자리잡았다.

헤럴드경제는 결혼과 출산·육아 등으로 10년 넘게 경력이 끊긴 40대 여성 4명을 만나 이들이 마주한 재취업과 노후의 현실을 들어봤다.

10년 넘게 아이 키워 돌아가려니 ‘경력 없는 신입’

네명의 여성은 육아가 어느 정도 끝난 뒤 다시 일을 찾으려 했으나, 긴 공백기 탓에 과거 경력을 제대로 인정받기 어려웠다.

김정남 씨는 결혼 후 임신하면서 직장을 그만뒀고 두 아이를 키우는 사이 공백은 13년으로 길어졌다. 다시 약 35곳에 이력서를 냈지만 70%가량은 연락조차 오지 않았고 면접까지 이어진 곳은 20% 수준이었다. 과거 약 9년간 쌓은 사무·회계 경력도 사실상 인정받지 못했다.

직업상담사 자격증을 새로 따고도 취업까지 1년 6개월이 걸렸다. 어렵게 직장을 얻었지만 급여는 13~14년 전보다도 적다. 김씨는 “급여나 워라밸을 고려할 상황이 아니었다”며 “우선 내가 할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는 일을 찾았다”고 말했다.

김지희(43) 씨도 사회복지 분야에서 정규직으로 일했지만 양가 부모에게 아이를 맡길 수 없어 일을 그만뒀다. 잠깐 쉴 생각이었지만 공백은 약 12년이 됐다. 여성인력센터에서 상담과 교육을 받고 5~6곳에 이력서를 냈지만 아직 아이들이 어려 과거처럼 교대근무를 하기는 어렵다.

그가 원하는 일자리는 ‘주 5일, 오전 9시 출근·오후 6시 퇴근’이다. 김씨는 이 조건을 이야기하면서도 “많은 욕심인가요”라고 되물었다. 오랜 공백 탓에 컴퓨터 업무부터 다시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자신감도 떨어졌다.

임지영(46) 씨는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 이후 재취업을 위해 침선공예 지도사 자격증을 획득했다. [독자 제공]
임지영(46) 씨는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 이후 재취업을 위해 침선공예 지도사 자격증을 획득했다. [독자 제공]

구체적인 지원 횟수를 밝힌 두 사람이 이력서를 낸 곳만 40곳이 넘는다. 하지만 모든 경력단절 여성이 이력서를 내는 단계까지 가는 것도 아니었다. 김운이(49) 씨는 10년 넘게 일을 쉬고 나니 이력서에 적을 만한 것이 없다고 느꼈다. 과거 고객센터에서 일했지만 육아가 끝난 뒤에는 “이제 너는 안 뽑는다”는 말도 들었다. 결국 설거지와 청소, 공장 실밥 제거·포장 등 이력서조차 필요 없는 단기 일자리만 20번 넘게 구했다.

김씨는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눈을 완전히 낮췄다”며 “몸이 고되더라도 쉽게 할 수 있는 일만 했다”고 회상했다.

임지영(46) 씨는 삼성화재 정규직으로 일하다 결혼과 임신·육아를 거치며 경력이 사실상 20년 가까이 끊겼다. 중간에 가방 판매 아르바이트를 10개월가량 했지만 이마저도 큰애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며 돌봄 공백 때문에 그만둘 수 밖에 없었다.

아이들이 자란 뒤에는 침선공예 지도사 자격증을 따고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 은메달을 받으며 새로운 길을 준비했다. 최근 3곳에서 면접을 보고 모두 합격했지만 강사직 2곳은 수강생이 모이지 않아 강의가 개설되지 않았다. 임씨는 현재 마산여성인력개발센터 창업마루에 입주해 한복 창업을 준비하고 있다.

각기 다른 상처 끝 같은 고민, ‘내 노후는 어떡하나’

오랜 경력단절이 남긴 흔적은 개개인에게 모두 다른 형태로 찾아왔다. 김정남 씨에게는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가 사라질 수 있다는 두려움, 임지영 씨에게는 경제적 독립의 상실이었다. 김지희 씨는 육아 때문에 선택할 수 있는 일자리가 제한됐고, 김운이 씨는 정식 취업시장에 도전할 자신감마저 잃었다.

임지영 씨는 일을 그만둔 뒤 자신의 수입이 사라진 때를 잊지 못한다. 친정을 돕거나 아이에게 무언가 사주고 싶어도 마음대로 돈을 쓸 수 없었다. 신용카드를 만들 때조차 남편의 직장 정보를 요구받았다. 임씨는 “신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신용도 없는 상태인 거였다”며 “그때 좀 회의감이 들더라”고 했다.

임씨가 자격증 획득 이후 각종 침선공예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입상한 모습. [독자 제공]
임씨가 자격증 획득 이후 각종 침선공예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입상한 모습. [독자 제공]

노후 불안은 최근 더 커졌다. 임씨는 남편에게 “당신이 지금까지 가족을 먹여 살렸으니 퇴직하면 내가 강사로 먹여 살리겠다”고 말해왔다. 하지만 합격했던 강사직의 강좌가 수강생 부족으로 폐강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자격증을 따고 실력을 쌓아도 실제 일자리와 소득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현실을 체감하면서부터다.

김지희 씨는 국민연금을 8년 7개월 낸 뒤 경력이 끊겼다. 외벌이로 네 식구가 생활하면서 별도의 노후 준비도 하지 못했다. 노후를 준비하려면 다시 소득을 만들어야 하지만 육아 때문에 지원할 수 있는 일자리부터 제한적인 상황이다.

김운이 씨 역시 개인적으로 준비한 연금이나 저축이 없고 노후 준비는 배우자 명의로 돼 있다. 그는 “일하러 가면 다른 엄마들이 나보고 젊다고 하는데 막상 사회에 나오면 나이가 많아서 할 게 없다”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때로는 ‘나는 뭐 하는 거지, 이렇게 쓸모가 없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자존감이 흔들린 사람도 있다. 김정남 씨는 아이들이 11살과 16살로 자라며 자신이 개인적으로 쓸 수 있는 시간은 늘었지만 ‘내 삶’을 다시 찾지 못하면 안 된다는 생각도 커졌다. 김씨는 “지금 조금 불편하더라도 내가 사회에 나오는 게 맞다”며 “나중에는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상황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경력단절 여성들의 노동시장 복귀를 돕기 위해 전국 여성인력개발센터와 새일센터 등에서는 직업상담·훈련과 취업처 알선 등을 지원하고 있다. 일부 센터에서는 160~300시간의 직업훈련과 여성인턴제도 운영한다.

김운이(49) 씨가 올해 초 재취업 기간 일주일에 한 번씩 주민센터에서 열린 정리수납 2급 자격증 수업을 수강한 모습. [독자 제공]
김운이(49) 씨가 올해 초 재취업 기간 일주일에 한 번씩 주민센터에서 열린 정리수납 2급 자격증 수업을 수강한 모습. [독자 제공]

하지만 교육이나 자격증이 안정적인 일자리로 곧장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서울시 여성인력개발센터 관계자는 “여성들이 주로 원하는 일자리의 임금이 낮게 책정된 부분이 있다”며 “육아로 경력이 계속 단절되는 여성들이 어떻게 경력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할 것인지가 고민”이라고 말했다.

해당 관계자는 “60세가 넘어가면 일반 취업시장에 새롭게 진입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돌봄 노동자를 비롯한 일부 직종을 제외하면 공공·노인 일자리 쪽으로 갈 수밖에 없어 선택할 수 있는 일자리가 많지 않다”고 말했다.

아이를 키우느라 일을 멈춘 시간은 이력서에 고스란히 ‘공백’으로 남는다. 공백이 길어질수록 경력·임금 뿐 아니라 노후를 준비할 시간도 함께 줄어든다. 자격증을 따고 교육을 받으며 다시 문을 두드리지만 여전히 녹록지 않다. 지금 40대인 이들이 말하는 노후의 두려움은 아직 닥치지 않은 미래가 아니라 이미 10여년의 경력 공백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jookapooka@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