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할 게 참 없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내세울 게 없으면 ‘사계절이 뚜렷하다’는 자연현상을 우리나라의 장점이라고 가르칠까. 어린 마음에도 그걸 보란 듯이 적은 초등학교 ‘자연책’이 우스웠다. 선생님도 같은 생각인지 그게 어떻게 자랑거리냐는 아이들의 물음을 얼버무렸다.

헐벗고 굶주리던 때였다. 봄꽃, 가을 단풍을 쳐다볼 새가 없었다. 여름은 그냥저냥 보내지만 살을 에는 혹독한 추위는 저주였다. 꽁꽁 얼어붙은 겨울 땅에선 아무것도 나지 않았다. 늘 따뜻한 남쪽 나라 사람들이 부러웠다. 옷은 한 벌이면 되고 3모작 벼농사로 쌀도 넉넉한 데다 바나나가 지천이라는데 그깟 겨울이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어느 정도 크고 나선 사계절을 받아들였다. 그래도 대단한 장점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라가 좀 살게 되고 나이를 먹으면서 알게 됐다. 봄꽃이 화려하고 향기로운 것은 지난 겨울이 매서웠기 때문이고 가을 단풍이 울긋불긋 아름다운 것은 여름 무더위를 버틴 까닭이었다. 여름 한낮과 겨울 한밤의 온도차가 60도에 이르는 ‘저주받은 날씨’의 축복이었다. 덕분에 ‘하늘은 어찌 저리 푸르고 구름은 어찌 저리 하얗고 단풍은 어찌 저리 붉은지’가 되었다.

7년여 전 10월 어느 날 지금은 고인이 된 박원순 서울시장과 세계 그 어디에도 찾아보기 힘든 사계절 속 우리의 이 가을을 전 세계인에게 팔아보자고 했다. 몰라서 그렇지 알면 미어터질지도 모른다면서…

달리 준비하고 꾸밀 것도 없었다. 오랜 세월 모두가 공들였지만 때가 되면 돌아오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상품이었다.

인사동-창덕궁-창경궁-경복궁-통인시장-자하문을 거쳐 북악산에 이르는 북길, 정동-덕수궁-경희궁-서대문-사직공원을 거쳐 인왕산에 오르는 서길, 명동-남대문-남대문시장-한옥마을을 거쳐 남산에 오르는 남길, 종로-탑골공원-종묘-광장시장-동대문을 거쳐 낙산에 오르는 동길이 추천 동선이었다. 도심과 산을 바로 잇는 산책길로 서울이라서 가능한 코스이다.

해외 관광객이라면 일주일 정도는 잡아야 눈 호강, 발 건강, 마음 건강을 누릴 수 있을 거라면서 우리끼리 ‘서울의 가을은 최소 1억달러’라고 맞장구쳤다. 더욱이 한 번 팔고 마는 것이 아닌 터에 새 꽃 피는 봄, 물 맑은 여름 계곡, 가을 단풍, 눈 덮힌 겨울 산까지 차례로 찾아오니 과연 사계절을 찬양할 만하다. 금강산을 금강, 봉래, 풍악, 개골산으로 부르는 이유다.

지금 대한민국과 서울은 세계적인 핫플레이스다. 나라 힘으로도 밀리지 않지만 노래, 드라마, 영화, 전통이 세계 속으로 스며든 문화대국이니 세계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아니 가질 수 없다. 그야말로 ‘몰라서 그렇지 알면 미어터질 때’다. 이미 다녀간 이들은 우리의 ‘불타오르는 가을’을 완벽한 풍경, 한폭의 그림이라며 추임새를 넣고 있다. 단풍의 나라라는 캐나다, 핀란드 사람들도 빨강, 주황, 노랑을 마구 버무린 한국 단풍에 ‘숨이 멎는 듯했다’는 후기를 남겼다.

설악산에 첫 단풍이 내려왔다. 곧 온천지가 붉디붉고 노라디노란 나뭇잎으로 가득 찰 터이다. 봄꽃이 올라온 그 길을 타고 가을 바람이 내려가면서 겨울을 부르겠지만 아무려면 어떠랴. 오늘 이 순간은 ‘오-매 단풍 들것네’라고 호들갑 떨면서 눈 앞에 펼쳐진 가을에 하염없이 빠져들 때다. 1억달러짜리 아닌가.

이영만 전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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