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힐드 킬데 국제입센상 사무국장
“분노 대신 연민·유머로 질문 던져”
K-드라마·K-팝에 이어 이젠 연극도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더 크고 더 요란한 것이 곧 최고로 여겨지는 시대, 구자하는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길을 보여줍니다.”
2026 서울아트마켓(PAMS·Performing Arts Market in Seoul) 참석차 처음 한국을 찾은 군힐드 킬데(Gunhild Kilde) 국제입센상 사무국장은 14일 서울 국립극장에서 기자들과 만나 구자하 작가의 수상 배경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문화전쟁과 양극화가 심해지는 시대에 우리가 찾은 것은 목소리 큰 예술가가 아니라, 우리 시대에 절실한 연민과 친절이었다”고 말했다.
국제입센상은 2007년 노르웨이 정부가 제정해 2년마다 주는 연극상으로, ‘연극계의 노벨상’으로 불린다. 상금은 250만 노르웨이 크로네(한화 약 3억5000만원). 2008년 전설적인 연출가 피터 브룩을 시작으로 아리안 므누슈킨, 욘 포세, 페터 한트케 등 거장들이 이 상을 받았다.
올해 열한 번째 수상자로 이름을 올린 구자하(42)는 벨기에 겐트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연극 작가이자 작곡가, 비디오 아티스트다. 그는 이번 수상으로 아시아계 최초이자 역대 최연소 입센상 수상자라는 타이틀을 안게 됐다.
킬데 사무국장은 “최초, 최연소 수상자라는 것 자체가 상징성을 갖는다”며 “구자하는 커리어의 한가운데에서 전 세계를 무대로 공연하고 있다. 노르웨이에 두 번 왔고 호주, 뉴욕, 에든버러, 아비뇽까지 어디에나 있다. 모두가 이야기하는 떠오르는 별”이라고 했다.
심사위원회가 구자하의 작업 전반에서 포착한 것은 ‘사이의 공간(space in between)’이다. 킬데 사무국장은 “오늘날 세계는 지나치게 찬성과 반대라는 이분법적 논리에 매몰돼 있다”며 “올해 국제입센상은 그 ‘사이의 공간’으로서의 연극에 상을 준다.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이자, 우리가 아직 모르는 것을 그려 보고 일깨우는 곳으로서의 연극을 선정 기준으로 삼았다”고 했다.
서울과 벨기에 겐트를 오가며 살고 있는 구자하는 ‘이주민’이자 ‘경계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묻는다. 작가의 고유한 궤적은 작품 안에서 타인과 대화의 장을 여는 장치로 작동한다고 봤다. 킬데 사무국장은 “한국인이 유럽에 와서 그 사이의 공간에 살며 ‘나는 어디에 속하는가’를 묻는 작품들”이라며 “구자하는 자기 이야기만 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람으로서 대화할 수 있도록 그 사이의 공간을 열어 둔다”고 말했다. 유럽의 관객들을 앞에 두고도 한국어로 무대를 올리는 그는 ‘고립무원’(‘쿠쿠’ 속 대사 중)처럼 다른 말로 옮기기 어려운 사자성어를 그대로 무대에 남겨줬다. 위원회는 선정문에 “모든 것이 번역되거나 들어맞을 수는 없다. 바로 그 틈, 사이의 공간에 구자하의 연극이 있다”고 적었다.
킨데 사무국장은 구자하의 수상에 대해 “문화전쟁과 심해지는 양극화, 줄어드는 문화예산의 시대에 위원회가 내놓은 대담한 선택”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디지털 세상일수록 함께 앉아 이야기를 듣는 극장이 필요하다. 우리는 같은 이야기를 저마다 다르게 해석하지만 서로가 필요하다. 구자하에게 상을 준 것은 사람들을 한데 모으는 데 문화가 필요하다는 선언과 같다”고 했다.
입센의 이름을 딴 상이 서구 정전(正典)을 비판해 온 작가를 택했다는 점도 흥미롭다. 구자하는 ‘한국 연극의 역사’(2020)에서 서양 연극이 한국에 들어와 전통 연극을 밀어낸 과정을 추적해 간다. 킬데 사무국장은 “아이러니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 상은 입센의 희곡이 아니라 그의 유산, 곧 진실의 정신과 자유의 정신에 관한 상”이라며 “입센은 설교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질문했다. 구자하는 올해의 완벽한 수상자”라고 강조했다.
구자하의 무대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다. 또 친밀하고 섬세하며 아기자기하기까지 하다. ‘쿠쿠’(2017)는 해킹한 전기밥솥 세 대와의 대화로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청년 세대의 고립을 풀어냈다. ‘하리보 김치’(2024)에선 무대 위에 포장마차를 가져와 김치전을 부친다. 현장에선 “아주 재밌고, 젊고 새로운 세대 관객을 위한 연극”이라고 평가한다.
킬데 사무국장은 “구자하의 작품은 매우 정치적이지만, 화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며 “식민 권력과 글로벌 권력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면서도, 작품 안에서 가능성과 희망을 본다”고 말했다.
지난달 26일 열린 오슬로 국립극장에서 열린 시상식에선 구자하의 한국어 소감이 현지에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당시 “우리는 더 빠르게 본다. 더 빠르게 판단한다. 더 빠르게 편을 가른다. 이에 비하면 연극은 놀라울 만큼 느리고 비효율적이다. 어쩌면 바로 그 비효율성 때문에 나는 여전히 연극을 믿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킬데 사무국장은 “그는 모든 작품에서 직접 무대에 서고, 늘 한국어로 말한다”며 “그것이 그의 예술이 말하는 모든 것”이라고 했다.
최근 전 세계 문화계에서 K-콘텐츠를 향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다.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 석권,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의 활약,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이어 구자하까지 쾌거를 잇는다. 구자하의 다음 행선지는 K-팝이다. 그는 내년 6월 초연을 목표로 작업을 진행 중이다. 킬데 사무국장은 “한국 예술계 전반에 흐르는 창의성의 폭발력은 매우 인상적”이라며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과 K-드라마, K-팝에 이어 이제 연극계도 한국을 본다. 완벽한 타이밍”이라고 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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