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김주리 기자] 부모와 성인 자녀 사이에서 연락을 끊거나 만남을 중단하는 사례가 미국과 영국 등에서 사회적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가족관계는 평생 유지해야 한다는 기존 인식이 약해지면서 개인의 정서적 안정과 관계의 질을 우선하는 흐름이 확산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달 26일 성인 자녀와 관계가 단절된 부모들의 사례를 소개하며 가족관계를 바라보는 사회적 기준이 달라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올여름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가족관계 단절 관련 콘퍼런스에는 자녀와 연락이 끊긴 부모 200여 명이 참석했다. 온라인으로 생중계를 시청한 인원도 약 250명에 달했다. 호주에서 미국까지 찾아온 참석자도 있었다.
미국 애틀랜타에 거주하는 은퇴 행사기획자 로빈 브릴(60)은 28세 아들과 3년째 연락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이번 행사에 참석한 부모들이 자녀가 연락을 끊은 이유를 이해하려 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다고 설명했다.
자녀와 연락 끊긴 부모 200여 명 모였다…“이유 알고 싶다”
가족관계 단절의 배경에는 오랫동안 쌓인 갈등과 학대, 가치관 차이 등이 있다.
부모가 자녀의 선택을 통제하거나 반복적으로 비판하는 행동이 갈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자녀가 성장하면서 종교나 정치관, 생활방식이 달라지는 것도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같은 가족 안에서도 과거 경험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다르다. 부모에게는 평범한 훈육이나 의견 충돌이었던 일이 자녀에게는 오랫동안 이어진 정서적 상처로 남을 수 있다.
영국 가디언은 지난 1월 가족과의 단절을 경험한 여성 바네사의 사례를 소개했다. 심리치료사로 일했던 바네사는 성인이 된 자녀들과 연락이 끊길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자녀들이 이전보다 멀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유를 물으면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후 한 자녀와의 다툼을 계기로 다른 자녀들까지 연락을 줄이면서 관계가 악화됐다.
바네사는 자녀들이 기억하는 과거의 가족생활과 자신이 기억하는 모습이 크게 달랐다고 설명했다.
호주심리학회 최고경영자 제나 버지스는 정신건강 문제와 가족 내 편애, 중독, 폭력, 가족 구성원 간 갈등 등이 관계 단절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가족 안에서 사랑이나 소속감을 충분히 느끼지 못한 경험도 영향을 미친다고 분석했다.
“가족은 평생 함께해야 한다”는 인식 변화…SNS도 영향
전문가들은 가족관계를 바라보는 세대 간 인식 차이에 주목하고 있다.
윌리엄 도허티 미국 미네소타대 가족사회과학 명예교수는 WSJ에 가족관계 단절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며 이를 ‘문화적 변곡점’이라고 설명했다.
과거에는 부모와 자녀가 갈등을 겪더라도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강했다. 최근에는 관계에서 반복적으로 상처를 받는다면 가족과 거리를 두는 선택도 가능하다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다.
미국 오하이오주립대 사회학자 린 레첵은 이를 가족관계의 의미가 달라지는 과정으로 분석했다. 혈연관계 자체에 의무를 부여하던 방식에서 상호 존중과 정서적 안정, 관계의 질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도 이러한 변화를 확산시키는 통로가 되고 있다.
틱톡과 인스타그램 등에서는 부모와 연락을 끊은 경험을 공유하거나 가족관계에서 심리적 경계를 설정하는 방법을 소개하는 콘텐츠가 확산하고 있다.
특히 ‘노 콘택트(No Contact)’라는 표현이 널리 사용된다. 가족과의 연락과 만남을 모두 중단하는 것을 뜻한다. 일부 온라인 콘텐츠에서는 이러한 선택을 정신건강을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 소개한다.
심리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상반된 평가가 나온다. 학대나 폭력 등 심각한 문제가 있는 가족관계에서 거리를 두는 것은 자기 보호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반면 SNS의 짧은 영상만으로 복잡한 가족관계를 판단하면서 일상적인 갈등까지 학대로 해석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가디언과 인터뷰한 가족·부부 심리치료사 캐서린 카발로는 가족 내 부적절한 행동과 어린 시절의 경험이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다고 평가했다. 동시에 온라인에서 심리학 용어가 부정확하게 사용되면서 가족 구성원을 지나치게 병리적으로 해석하는 현상도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완전한 절연 대신 ‘제한적 연락’…가족관계의 새로운 선택
부모와 관계를 완전히 끊는 대신 연락과 만남을 제한하는 방식도 주목받고 있다.
가디언은 지난 2월 가족과의 접촉을 최소한으로 유지하는 ‘로 콘택트(Low Contact)’ 현상을 소개했다. 전화나 방문 횟수를 줄이고 필요한 상황에서만 연락하는 방식이다.
40대 여성 마리는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오랫동안 불편함을 느껴왔다. 그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는 횟수를 줄이고 가족에게 필요한 소식이 있을 때만 직접 연락하기로 했다.
어머니와 관계를 완전히 끊으면 자녀들이 할머니를 만날 기회까지 사라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50대 여성 캐럴라인도 어머니와의 갈등 끝에 연락 방식을 바꿨다. 매일 통화는 유지하되 시간을 5분으로 제한하고 직접 만나는 횟수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로 줄였다.
그는 연락을 줄인 뒤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반응을 돌아볼 기회를 얻었다고 설명했다.
카발로는 제한적 연락이 관계를 완전히 끝내기 전에 서로에게 필요한 거리를 확보하는 절충안이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갈등을 줄이면서 향후 관계를 어떻게 유지할지 살펴볼 시간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족관계의 단절을 겪은 사람들이 다시 연락을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 가디언은 관계를 회복하려면 상대방의 경험을 이해하고 갈등의 원인을 인정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전했다.
rainbow@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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