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은·윤보나·김원호·홍성혁 서면 인터뷰

18일 인천·20일 예술의전당…주미 강 협연

에스토니안 페스티벌 오케스트라(EFO) [빈체로 제공]
에스토니안 페스티벌 오케스트라(EFO) [빈체로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자존심을 내세우거나 경쟁하는 분위기도 없고, 정치적인 문제도 없어요. 각자의 스트레스는 집에 두고, 오로지 음악을 만들기 위해 모이죠.” (제1 바이올린 윤보나)

발트해의 잔잔한 물결이 내려다보이는 에스토니아의 휴양 도시 패르누. 세계 유수 오케스트라와 실내악단, 독주자로 활동 중인 연주자들이 해마다 7월, 여행 가방과 악기 하나 둘러메고 이곳을 찾는다. 지휘자 파보 예르비가 2011년 창단한 에스토니안 페스티벌 오케스트라(EFO)다. EFO는 패르누 뮤직 페스티벌의 상주 악단으로 예르비가 모든 단원을 직접 고른다.

올해로 창단 15주년을 맞은 EFO가 첫 내한 이후 4년 만에 한국을 찾았다. 18일 아트센터인천을 시작으로 오는 20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관객과 만난다. 순수한 음악적 교감을 위해 모인 이 특별한 악단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단원 네 명을 서면으로 만났다. 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 제1바이올린 단원인 이경은, 도이치 캄머필하모닉 브레멘 아카데미 출신이자 8년째 EFO에 몸담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윤보나, 독주와 실내악 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한 바이올리니스트 김원호, 카를스루에 국립음대 교수인 더블베이시스트 홍성혁이다.

네 사람이 패르누에 닿은 길은 모두 예르비로 이어진다. 이경은은 예르비가 음악감독으로 이끄는 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의 오디션에서 그를 처음 만났고, 그 자리에서 EFO로 초대받았다. 홍성혁은 예르비가 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을 이끌던 시절 그 악단의 단원이었다. 윤보나는 도이치 캄머필하모닉 아카데미 2년 차에, 김원호는 2023년 여름 예르비의 부름을 받았다.

EFO 단원 이경은 [빈체로 제공]
EFO 단원 이경은 [빈체로 제공]

국적도 직함도 내려놓은 자리

EFO 단원들은 겨우 1년에 한두 번 모인다. 리허설은 고작 3~4일 정도. 윤보나는 “정규 직장이 아니라 말 그대로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라며 “그럼에도 소리는 놀라울 만큼 빠르게 하나로 모인다”고 귀띔했다. 비결이 분명하다.

“EFO에선 출신 국적이나 소속 오케스트라의 타이틀보다 ‘음악가로서 오늘 이 자리에서 어떤 소리를 함께 창조할 것인가’가 최우선이에요.”

김원호는 그 마음이 소리에서 고스란히 배어난다고 했다. 그는 “EFO의 모든 연주자는 오직 음악을 위해 이곳에 모이고, 서로가 최고의 연주를 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며 ”소리에는 어느 정도의 개방성과 즉흥성, 그리고 과감하게 시도하려는 의지가 있다”고 헸다. 단원들의 자유로움은 긴장감과 맞닿아 있다. 홍성혁은 “정규 오케스트라보다 훨씬 민감하게 서로를 듣고 반응해야 해서 연주자로서 가끔 큰 도전이 되기도 한다”고 털어놨다.

해마다 새 얼굴이 합류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윤보나는 그것을 ‘EFO의 정신’이라고 했다.

“매년 새로운 연주자들이 합류하지만, 신기하게도 만들어지는 음악에는 늘 같은 정신이 있어요. 그것이 파보의 마법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우리에게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인지는 저도 가끔 궁금해요. 아마 두 가지 모두일 거예요.” (윤보나)

바이올리니스트 김원호 [빈체로 제공]
바이올리니스트 김원호 [빈체로 제공]

지난 8년간 그가 가장 감탄해 온 것도 이 악단이 “계속해서 겸손하고 자신다운 모습을 지켜왔다는 점”이다.

“음표 말고 음악을”…예르비에게 배운 것

“파보 예르비는 연주자들이 서로의 소리에 귀 기울이도록 만듭니다.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지휘자들만이 진정으로 가진 능력입니다.”

김원호가 기억하는 예르비는 아주 작은 표정과 손짓만으로 원하는 소리를 전하면서도, 연주자에게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대로 연주하라고 북돋우는 지휘자다. 이경은 역시 “음악적 지향점은 명확하지만 이를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않는다”며 “단원들이 스스로 그 소리를 발견하고 풀어나갈 수 있도록 정교하게 이끌어준다”고 했다. 홍성혁의 눈에 비친 예르비도 다르지 않다.

“단원들을 일방적으로 끌고 간다기보다 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먼저 보이고, 그 열정이 자연스럽게 단원들의 사운드로 구현됩니다.” (홍성혁)

윤보나에게 예르비는 음악가로 자라난 시간과 포개진다. 아카데미 시절 그는 예르비와 함께 베토벤 교향곡 전곡과 브람스·슈만·슈베르트 교향곡 전곡을 처음 연주했다. 현악 사중주에 몰두하던 그는 “그 뒤로 베토벤을 듣는 방식 자체가 완전히 달라졌다”고 돌아봤다.

“리허설에서 그는 우리가 모두 함께 이 음악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느끼도록 소통해요. 그 안엔 어떠한 위계도 없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음악뿐이에요.“ (윤보나)

EFO 단원 윤보나 [빈체로 제공]
EFO 단원 윤보나 [빈체로 제공]

그 음악의 뿌리는 아버지 네메 예르비에게 닿아 있다. 올여름 패르누에서 네메와 한 무대에 선 윤보나는 “파보가 그 많은 음악적 지식을 어디에서 가져왔는지 직접 볼 수 있었다”고 했다. 네메의 당부는 짧고 단호했다. “음표만 연주하지 말고 음악을 만들어라. 음악을 만드는 것을 멈추지 마라.” 2018년 영국 BBC 프롬스 투어 리허설에서 작곡가 아르보 패르트가 남긴 말도 윤보나의 연주 안에 살아 있다. “이 화음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 것 같군요. 사랑으로 감싸 안아보세요.” 두 팔로 제 몸을 감싸 안아 보인 노작곡가 앞에서 다시 울린 화음은 “완전히 다른 화음처럼 들렸다“고 한다.

서로 다른 세 작곡가, EFO를 닮은 무대

이번 공연은 에스토니아 작곡가 에르키스벤 튀르의 ‘패션-일루전’으로 문을 연다.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3부작 ‘액션-패션-일루전’ 가운데 뒤의 두 곡으로, 국내 초연이다. 클라라 주미 강이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하고, 2부는 18일엔 브람스 교향곡 1번을 연주했고, 20일엔 시벨리우스 교향곡 5번으로 꾸민다. 윤보나는 이 구성을 “EFO의 이념과도 같은 프로그램”이라 했다.

“서로 다른 문화에서 온 세 명의 작곡가가 함께합니다.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음악을 만들어가는 EFO의 모습과도 닮아 있죠.”

홍성혁은 튀르의 곡이 “EFO의 아이덴티티를 가장 잘 보여주는 무대”가 되리라 봤다. 김원호는 튀르의 음악을 “바로크 음악의 요소와 미니멀리즘, 록에서 가져온 기법을 결합해 깊은 시적 감성을 지니면서도 매우 흥미롭게 들린다”고 했다.

EFO 단원 홍성혁 [빈체로 제공]
EFO 단원 홍성혁 [빈체로 제공]

브람스는 예르비가 도이치 캄머필하모닉과 관현악 전곡을 녹음하며 오래 천착해 온 작곡가다. 같은 지휘자의 브람스를 두 악단에서 연주해 온 윤보나는 그 차이를 편성에서 읽었다. 소편성인 도이치 캄머필하모닉과 달리 “EFO는 정규 편성의 대규모 오케스트라라 그 자체로 훨씬 더 낭만적인 소리를 낸다”면서도 “결국 해석은 파보에게서 나오기에 두 오케스트라 사이에는 여전히 많은 공통점이 있다”고 했다.

네 사람에게 이번 무대는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이기도 하다. 김원호는 “해외에서 성장한 한국계 2세라는 비슷한 배경을 공유하고 있어 서로 깊이 연결돼 있다”고 했고, 뉴질랜드에서 자란 윤보나는 “입맛만큼은 확실히 한국인”이라고 덧붙였다. 이경은은 관객들이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전체가 하나의 유기적인 생명체처럼 움직이는 호흡”을 느껴주기를 바랐다.

음악가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김원호가 남긴 말은 EFO가 해마다 패르누로 돌아가는 이유와도 닮아 있다. “음악가의 삶에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도 있어요. 하지만 결국 우리를 다시 중심으로 돌아오게 해주는 것은 언제나 음악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김원호)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