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송하준 기자] 금융당국이 SK하이닉스의 미국 손자회사 솔리다임 상장 추진을 중복상장 규제에 저촉되는 사안으로 판단하면서 해외 자회사 상장에 적용되는 국내 규제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8월부터 해외 자회사 상장에도 모회사 이사회의 주주 보호 의무가 적용되면서 국내 기업들의 해외 IPO 추진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분석이다.
20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은 전날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솔리다임의 미국 증시 상장 추진과 관련해 금융위원회와 금감원 모두 중복상장에 저촉된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는 취지로 밝혔다. 미국 법인의 현지 상장에 국내 자본시장 규제를 어디까지 적용할지가 핵심 쟁점이다.
금융당국의 이번 판단에 시장이 주목하는 것은 해외 증시 상장을 추진하거나 검토하는 국내 대기업 계열사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현대자동차그룹은 미국 로봇 자회사 보스턴다이내믹스의 나스닥 상장을 검토 중이며, LG전자의 미국 로봇 자회사 베어로보틱스는 상장 전 투자유치(프리IPO)를 추진하고 있다. 두산그룹의 미국 수소·연료전지 자회사 하이엑시엄은 지난달 외국계 증권사들을 대상으로 IPO 주관사 선정을 위한 입찰제안요청서(RFP)를 발송했다. CJ대한통운의 물류 자회사 다슬로지스틱스 역시 인도 증시 상장을 추진하며 현지 예비심사 승인을 받은 상태다.
금융위와 한국거래소는 지난 8월 3일부터 중복상장 제도 개선안을 시행하고 있다. 국내 상장사의 자회사가 해외 증시에 상장하더라도 모회사 이사회는 일반주주 보호를 위한 5대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자회사 상장이 주주에게 미치는 영향 평가 ▷주주 보호 방안 마련 ▷주주 소통 또는 동의 여부 확인 ▷이사회 찬반 결의 및 자회사 통지 ▷관련 정보 공시 등이다.
모회사 이사회는 3인 이상으로 구성된 특별위원회의 심의·의결도 거쳐야 한다. 특별위원회는 독립이사가 위원장을 맡거나 전체 위원의 3분의 2 이상을 독립이사 또는 독립이사 자격요건을 충족하는 외부전문가로 구성해야 한다. 주주동의 표결을 거치지 않았다면 그 이유도 공시해야 한다.
기업별 상황에 따라 규제 적용 범위에도 차이가 있다. 모회사 대비 매출과 영업이익, 자산 비중이 모두 10% 미만인 저비중 자회사는 주주동의 면제 대상이다. 다만 세 가지 요건을 충족하더라도 예상 기업가치를 고려해 중요 자회사로 인정되면 면제 대상에서 제외된다. 현대차그룹의 보스턴다이내믹스는 저비중 자회사에 해당해 주주동의 면제 가능성이 거론된다.
규제 강화 이후 모회사 이사회가 주주가치 훼손을 우려해 자회사의 해외 상장에 제동을 건 사례도 나왔다. 카카오모빌리티는 지난 7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상장 관련 서류를 비공개로 제출했지만, 카카오 이사회는 지난달 22일 미국 증시 상장 추진에 반대하기로 결의했다. 특정 재무적 투자자(FI)의 지분 매각이 주된 목적인 만큼 카카오 일반주주에게 돌아갈 이익이 충분하지 않고, 순자산가치(NAV) 할인 확대 등 이해충돌 우려가 크다는 판단에서다.
기업 입장에서는 해외 자회사 상장이 현지 사업 확대를 위한 자금조달 수단이라는 점에서 규제 강화에 대한 부담도 제기된다. 해외 증시 상장은 현지 투자자들로부터 신규 자금을 유치하는 통로지만, 국내 모회사 이사회의 주주 보호 절차까지 거쳐야 한다. 해외 투자자들과 협의한 상장 일정에 변수가 생기면 자금조달 계획은 물론 재무적 투자자(FI)의 투자금 회수에도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주주 보호 방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도 기업의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금융당국이 제시한 방안에는 현금배당과 자사주 소각, 자회사 주식 현물배당 등이 포함돼 있다. 기업들은 해외 사업 확대에 필요한 투자 재원을 확보하는 동시에 모회사 일반주주에게 돌아갈 이익도 고려해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관세 정책 등을 앞세워 한국 기업들의 현지 투자를 압박하는 상황도 부담을 키우는 요인이다. 국내 기업들이 미국 내 생산시설 확충과 사업 확대에 나서는 가운데 해외 자회사 상장에 대한 국내 규제까지 강화되면서 현지 투자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는 데도 부담이 커졌다는 분석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솔리다임의 미국 증시 상장이 SK하이닉스의 투자 여력에 미칠 영향도 주목된다. SK하이닉스는 솔리다임을 통한 미국 낸드 공장 건설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블룸버그 인텔리전스(BI)의 마사히로 와카스기 선임 산업 애널리스트는 지난 15일 보고서에서 솔리다임이 미국 증시 상장을 통해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용 기업용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eSSD)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자체 조달하면 SK하이닉스의 고대역폭메모리(HBM)와 서버용 D램 등 핵심 사업 투자 여력이 확대될 것으로 분석했다.
엄수진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자회사 해외 증시 상장은 현지 공장 건설, 해외 기업 인수합병, 해외 우수 인력 확충, 해외 공급망 및 유통 채널 확장 등을 통해 자회사의 핵심 역량이 유의미하게 제고될 수 있다는 확신과 근거가 명확할 때 추진되어야, 그 당위성이 확보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hajun825@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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