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율리우스 아살 서면 인터뷰
클래식 음반사 도이치 그라모폰 전속 계약
2년 만의 내한, ‘엠마 하우크…’ 韓 초연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사랑하는 당신, 와줘요(Herzensschatzi, komm).”
1909년 독일 하이델베르크의 한 정신병원. 서른 살의 엠마 하우크가 남편에게 보낸 편지엔 같은 말이 끝없이 되풀이됐다. 빈틈없이 메운 처절한 절규. 하지만 편지는 한 통도 부쳐지지 않았다. 답장도 당연히 오지 않았다. 편지는 진료 기록 속에 잠들고 말았다.
117년이 흐른 지난 3월, 그 편지가 피아노 음악이 돼 울렸다. 러시아 출신 작곡가 레라 아우어바흐의 ‘엠마 하우크의 러브 레터’를 통해서다. 영국 버밍엄에서 이 곡을 세계 초연한 독일 피아니스트 율리우스 아살(29)이 같은 곡을 품고 한국 관객 앞에 선다.
“저에게 이 작품은 지금까지 들어보거나 읽어보거나 연주해 본 그 어떤 것과도 달라요. 이 음악과 같이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영광이지만, 인간 내면의, 이토록 깊은 심연을 오랜 시간 들여다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어요.”
아살은 헤럴드경제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2023년 도이치 그라모폰(DG)과 전속 계약을 맺은 그는 세계 음악계가 주목하는 피아니스트다. 그가 2년 만에 한국을 다시 찾아 지난 6일을 시작으로 리사이틀(20일 예술의전당, 21일 강릉아트센터)을 이어가고 있다.
아살은 “올해 다시 한국을 찾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일”이라며 “한국 관객분들은 음악에 대한 열정이 매우 강하고, 그 열정을 아티스트가 진정한 따뜻함과 신뢰를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표현해준다”며 감탄했다.
자연스러운 호흡으로 만나는 피아노, 그리고 ‘시에나 테이프’
아살에게 피아노는 말을 배우기 전부터 함께해 온 “모국어이자 삶의 근간”이다.
피아니스트인 어머니가 제자들을 가르치는 소리를 따라 치며 악기는 자연스럽게 아이의 장난감이 됐다. 여덟 살이 될 때까지 정식 레슨을 받아본 적이 없다. 놀이 삼아 피아노를 쳤던 그는 베를린 한스 아이슬러 음대와 크론베르크 아카데미에서 엘다 네볼신과 안드라스 시프를 사사했다.
아살이 세계 음악계에 두각을 드러낸 방식은 일반적이지 않다. 젊은 연주자들의 상당수가 세계적 권위의 콩쿠르를 통해 얼굴을 알릴 때, 그는 인스타그램 알고리즘을 통해 등장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라온 아살의 독창적인 연주와 즉흥적인 음악적 시도를 DG가 발견, 음반 녹음으로 이어졌다.
아살은 “나의 음악적 언어가 어디로 갈지는 너무 많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며 “그저 지금 곁에 있는 음악과 함께 현재에 머물며 그 음악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지켜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9월 발매한 앨범 ‘시에나 테이프(Siena Tapes)’는 모리스 라벨 탄생 150주년을 기리며 그의 음악에서 출발했으나, 점차 아살만의 개인적인 프로젝트로 확장됐다.
그는 “프로듀서와 도이치 그라모폰은 내게 직감을 따르고 그저 나 자신일 수 있는 자유를 줬다”며 “덕분에 라벨의 음악에서 출발한 즉흥적인 아이디어들이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됐다”고 돌아봤다.
그러면서 “순수하게 기존 작품을 해석하는 데에만 집중하는 작업이었다면 이와 같은 방식으로 드러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며 “이 프로젝트 전체가 내 성격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생각한다”고 말했다.
“감정 세계로 들어가는 롤러코스터”
이번 리사이틀에선 아살의 큐레이션 역량이 돋보인다. 베토벤의 첫 피아노 소나타(1번)와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32번, Op. 111)를 양 끝에 두고, 그 사이에 버르토크의 ‘세 개의 벌레스크’와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 Op. 14, 아우어바흐의 ‘엠마 하우크의 러브 레터’를 배치했다.
프로그램을 구성한 방식엔 아살의 음악관이 담겨 있다. 그는 “개별적으로 돋보이는 곡들을 한데 모아놓는 것보다, 프로그램 전체에 걸쳐 긴장감을 만드는 것에 늘 더 관심이 많다”며 “현재 다른 어느 곳에서도 연주하고 있지 않은 프로그램”이라고 귀띔했다.
“인간의 가장 내밀한 감정 세계로 들어가는 여정이에요.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과도 같죠. 베토벤이 바깥을 감싸는 틀을 이루고, 그 중심엔 초기 버르토크의 음악이 자리하고 있어요. 베토벤이 처음과 끝을 맺는 것은 마치 하나의 원이 완성되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여전히 열려 있어 답을 남겨두는 듯한 느낌이죠.”
베토벤 사이에 자리한 ‘엠마 하우크의 러브 레터’를 대하는 마음은 각별하다. 그는 초연을 앞둔 몇 주 동안 작곡가와 긴밀히 의견을 나눴다. 아살은 “연주자로서 누릴 수 있는 굉장히 특별한 경험”이라며 “베토벤에게 왓츠앱 메시지를 보내 악보의 어떤 부분이 무슨 뜻을 가졌는지 물어볼 수는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작곡가 레라 아우어바흐와는 바라보는 곳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레라와 저는 많은 예술적 판단에서 의견이 잘 맞았다”고 돌아본다.
“하지만 연주자로서 내린 선택을 작곡가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바라보며 자신의 시각을 들려줄 수 있다는 것은 언제나 굉장히 가치 있는 일이에요. 반대로 작곡가에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연주자는 음악에 목소리를 부여하는 역할을 해줌으로써, 작곡가가 자기 작품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그 음악을 다른 방식으로 들어볼 수 있게 해주니까요.”
그는 엠마 하우크의 편지를 “강렬한 하나의 예술 작품에 가까운 무언가”라고 봤다. 이 작품을 마주할 땐 니체의 말을 떠올리곤 한다. 아살은 “‘심연을 너무 깊이 들여다보면 결국 그 심연 역시 나를 들여다보기 시작한다’는 니체의 말처럼 굉장히 강렬한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바로 그 점이 이 작품을 그토록 어렵게 만드는 동시에, 강렬하게 끌리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라고 했다.
아살은 늘 인간 내면의 어둡고 감춰진 지형을 응시해 왔다. 평소 프란츠 카프카와 게오르크 뷔히너 같은 문학에 깊이 매료됐다는 그는 음악의 어두운 면에 이끌려왔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가 좇는 것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절망이 아니다.
“어떤 것이든 그와 반대되는 다른 한쪽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믿어요. 순수한 어둠은 그 자체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아무런 의미도 없을 거예요. 우리의 삶에는 대비가 필요합니다.”
AI가 대체 못 하는 ‘단 하나의 특권’, 사유
아살의 예술적 지형도는 음악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서로 다른 시대와 악곡을 직조해 독창적인 맥락을 만들어내는 그의 큐레이션은 공간과 건축을 향한 시선과도 맞닿아 있다.
그는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일은 연주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부분”이라며 “어떤 레퍼토리를 연주할 것인지, 무엇을 연주하지 않을 것인지를 선택하는 일은 예술가가 내릴 수 있는 가장 개인적인 결정 중 하나”라고 강조한다.
아살은 오랜 시간 현대 건축에 매료됐다고 한다. 현대 건축을 마주할 때 다가오는 ‘정서적 울림’이 특별해서다. 그는 “음악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들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것에서도 영감을 받는다”며 “그렇다고 ‘숨은 연결고리’를 의식적으로 찾아다니는 것은 아니다. 대개 자연스럽게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고, 거기에서 자라나는 아이디어 역시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라고 했다. 숙고를 거듭하는 큐레이션의 마지막 연결고리는 청중이다. “결국에는 이러한 생각에 함께 귀 기울이고, 각자의 방식으로 받아들여 줄 의지가 있는 청중이 필요하죠.”
예술적 직관을 믿고 나아가는 태도는 위기 앞에서 단단한 내공으로 빛을 발한다. 지난해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안드레이 보레이코의 지휘로 스크랴빈 피아노 협주곡 Op. 20의 대체 연주자로 투입됐다. 세계적인 거장 피아니스트 키신을 대신한 무대였다. 아살은 “유난히 고된 한 주였지만, 이런 경험을 할 때마다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힘이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고 돌아봤다.
기계적인 알고리즘과 인공지능(AI)이 작곡부터 연주까지 모방하는 시대에 그가 꾸준히 즉흥연주를 이어가는 데엔 이유가 있다. 오직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 인간의 호흡이기 때문이다.
“AI 시대에 무대 위에서 실시간으로 즉흥연주를 하고, 오직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무언가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특권이라고 생각해요.”
이 특별한 순간을 함께할 리사이틀을 찾는 관객에게 아살은 고요한 ‘내면의 여정’을 함께 나누자고 청한다. 그가 늘 붙들어 온 궁극의 과제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고요한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껏 노력해 온 것 중 하나는 피아노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음악이 내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발견하는 것”이라며 “이는 결코 끝이 없는 과정”이라고 했다.
“이번 공연을 마친 뒤 자신의 내면을 향한 하나의 여정에 함께했다는 느낌을 받으셨으면 해요. 오랫동안 익숙하게 들어온 음악이라도 새로운 귀로 듣고, 그 음악이 다시 새롭게 다가오는 경험이길 바랍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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