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기술 경쟁은 전기와 시간의 싸움이다. 1000조원 규모의 AI 메가프로젝트에는 전력을 공급하는 송전망이 핵심 과제다. 용인 반도체클러스터는 민원 문제로 송전망 건설이 어려워 수년간 지체되고 있다. 송전망은 사실상 안보문제다. 30년 전 ‘북한 경수로 건설 사업’이 실패한 원인도 결국 송전망 문제로 귀결된다. 필자는 북한 현장에서 실상을 직접 체험했다.

‘경수로 사업’이란 북한 비핵화에 관한 북미 제네바합의에 따라 설립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가 북한에 50~60억달러의 건설비를 무이자로 빌려주는 조건으로 경수로 냉각식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수로 사업에는 경제개념이 전혀 없었다. 별도의 차관협정도 없고, 송전망 건설과 그 전기를 써야 할 산업시설 개선을 위한 투자계획도 없었다. ‘열쇠 인도 조건’(턴키베이스)으로만 이해했던 북한도 송전망 없는 발전소가 무용지물이라는 것은 금방 알아차렸다. 1998년 4월 뉴욕 KEDO본부에서 우연히 만난 허종 북한 대사는 필자에게 “송전망 건설을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며 불만과 배신감을 토로했다. 그는 20억 달러의 송전망 건설비 협의를 위해 뉴욕을 찾았었다.

북한은 그즈음부터 제네바합의를 방기하고 내부 책임 추궁도 시작한 것 같다. 말과 태도가 거칠어지고 ‘군부’ 언급이 많아졌다. 결국 북한은 8년 후인 2006년 핵실험을 감행했다. 만약 경수로 사업을 송전망과 산업투자를 포함한 종합경제개발 개념으로 추진했다면 그 지렛대 효과가 작용했을 것이다. 지난 30년간 북한 비핵화 외교 실패는 미국 주도의 제네바합의와 경수로 사업의 부실함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의 배고픔의 계절인 여름 노동신문은 ‘미래를 위해 현재의 고통을 이겨내자’는 글을 게재한다. 지난 7월 정론 ‘혁명하는 시대’와 29년 전 6월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라는 긴 사설은 사실상 똑같은 내용이다. 김정은 체제에서도 배고픔은 여전하고 혁명의 공포는 더 커졌다. 핵위협과 미사일 도발은 더 심해졌다. ‘적대적 두 국가론’으로 남북대화는 극한적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북한 관료들은 책임의 공포 때문에 막연한 대화나 소규모 경제지원 제안을 거부한다. 당장 북한 비핵화는 어렵고 강경책이든 유화책이든 약발은 떨어졌다. 한반도의 평화 조건이 변한 것이다. 정치인과 외교관들이 지난 30년의 우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대화로 유인하지만, 북한의 행태는 비위를 맞출수록 더 강경해지는 구조다. “그 둘을 한 방에 있게 하면 안 된다”(이코노미스트)는 우려도 있다. 미국의 중간선거와 이란, 우크라이나 양 전쟁의 결말도 북한의 행태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적대국 간 대화는 오히려 위기가 고조되고 강·온 양면정책이 동시에 작동될 때 시작될 수 있다. ‘페이스메이커’도 자신의 의견과 그 서사(내러티브)를 내세우고 레토릭도 구사해야 한다. 만약 정치·외교·경제가 연계된 구체적인 미래를 미리 펼쳐 보여준다면 북한의 관심을 유인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미국과 사전 조율은 필수다. 북한의 핵위협과 비무장지대(DMZ) 국경화 지뢰매설 등 도발이 남북 간 긴장과 남남갈등을 초래하는 악조건에서는 전문가들이 우선 이런 그림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이현주 전 외교부 국제안보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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