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운드 콜렉티브 트랜지언츠 윤지영·조예본

26일까지 서울대 옛 보일러실 ‘소닉 노마드’

서리풀공원에서 목초지까지…소리의 기록

서울 홍제천에서 진행한 2025 필드레코딩 워크숍 2에서 윤지영(앞)이 바위 위에 서서 윈드실드를 씌운 마이크와 녹음기로 소리를 채집하고 있다. [트랜지언츠 제공]
서울 홍제천에서 진행한 2025 필드레코딩 워크숍 2에서 윤지영(앞)이 바위 위에 서서 윈드실드를 씌운 마이크와 녹음기로 소리를 채집하고 있다. [트랜지언츠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스위스의 평화로운 초원을 가르며 카우벨 소리가 들려왔다. 목가적 풍경을 완성하는 이 소리에 녹음기가 절로 켜졌다. 애초에 ‘자연의 소리’를 채집하러 찾은 곳이었다.

“자연의 소리와 소들 목에 달린 벨소리가 어우러질 때, 정말 아름다운 소리라고 느꼈어요.”

시작은 가벼운 마음이었다. 발견의 기쁨도 더해졌다. 그러나 윤지영은 소리의 이면을 들었다. 그는 “카우벨이 인간이 동물을 통제하기 위해 쓰는 소리라고 생각하니, 들을 때마다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때 들은 방울 소리는 트랜지언츠(윤지영·조예본)의 신작 ‘스침’에 담긴다. 서울 서리풀공원과 스위스·몽골·제주의 풀밭에서 채집한 소와 염소, 양, 풀벌레 소리로 빚은 작품이다.

트랜지언츠는 ‘필드레코딩(field recording)’을 하는 사운드 아트 콜렉티브다. 마이크와 녹음기를 들고 숲으로, 기차역으로, 공사장으로, 혹은 군중 속으로 스며들어 그곳의 소리를 받아 온다. 정교하게 연출된 소리, 사람의 의도가 개입한 소리와는 완전히 다르다. 윤지영은 “우리 주변의 소리, 일상의 소리, 현실에 있는 그대로의 소리를 채집하는 것이 필드레코딩”이라고 설명했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가 연기한 사운드 엔지니어 상우가 담던 자연의 소리, 최근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서 가수 던이 경복궁에서 녹음한 소리도 필드레코딩의 결과물이다.

두 사람의 귀가 향하는 곳은 ‘세상의 모든 소리’다. 너무 익숙해서 듣지 못하는 소리, 들리지만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 흘려보내는 소리, 늘 주인공이던 소리 뒤에 가려진 소리까지. 세계 26개국 창작자들이 저마다 길어 올린 소리로 만든 작품 68편이 오는 25일까지 서울대 제1파워플랜트를 채운다. 두 사람이 만든 사운드 아트 페스티벌 ‘소닉 노마드(Sonic Nomads)’의 두 번째 무대다.

최근 서울 서초동에서 만난 윤지영(42)·조예본(34)은 “필드레코딩에 대한 관심이 달라지고 있다는 걸 느낀다”고 했다. 트랜지언츠는 그 이유로 “넘쳐나는 시각 매체에 대한 피로감이 커지는 가운데, 필드레코딩은 AI(인공지능)로도 아직 생성해 낼 수 없는 영역이라는 점”을 꼽는다.

사운드 아트 콜렉티브 트랜지언츠 조예본 윤지영 [트랜지언츠 제공]
사운드 아트 콜렉티브 트랜지언츠 조예본 윤지영 [트랜지언츠 제공]

마이크를 들자, 세상이 다르게 들렸다

“지금 이곳은 한쪽 벽은 통유리이고, 다른 쪽은 트여 있잖아요. 이런 공간에선 소리가 전달되는 형태가 달라 음색도 다르게 들려요.”

일종의 직업병이다. 오래 들을수록 귀는 더 예민해졌다. 최신 플레이리스트가 흐르는 카페에서도 조예본은 ‘공간의 소리’부터 짚었다. 윤지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듣는 감각이 좀 더 열리는 것 같고, 남들이 신경 쓰지 않는 소리도 잘 듣게 된다”고 했다. 심지어 울림이 심한 공간은 문을 열자마자 돌아 나온 적도 있단다.

‘데어데블’ 부럽지 않은 귀를 얻기까지 두 사람은 저마다 다른 길을 걸었다. 생명과학을 공부한 윤지영의 세계를 흔든 건 멜로디도 가사도 없는 미니멀 테크노였다. “화성적이지 않아도 음악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마음을 굳힌 건 독일에서 지내던 어느 새벽이었다. 새벽 3시, 함께 사운드를 공부하던 친구, 교수님과 어둠 속에서 새들이 깨어나길 기다렸다. “작은 새들이 소리를 내다가 아주 큰 새가 지나갔는데, 다들 숨도 쉬지 않고 그 소리를 들었어요.” 윤지영은 그날 “필드레코딩은 정말 멋진 일이고, 이걸 계속하며 살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돌아봤다.

조예본에겐 오래도록 오선지가 놀이터였다. 수백 년 동안 ‘위대한 작곡가’들이 쌓아 온 정교한 규율과 선율의 세계가 그의 토대였다. 그러다 대학에서 녹음한 소리를 시간 위에 배치해 공간을 짓는 ‘어쿠스매틱’ 음악을 만났다. 오선지 위에서만 음표를 다루던 작곡가에게 현실의 공간 전체가 악보가 됐다. “그때부터 모든 소리가 음악의 재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처음 녹음기를 들고 나선 날은 지금도 선연하다. 2015년, 대학교 2학년 때 찾은 서울역과 동서울터미널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이동하는 공간을 담고 싶었다”며 “녹음하는 행위 자체가 나에게 뭔가 새로운 것을 준다는 생각이 들어 그 뒤로 계속 마이크를 들고 다니게 됐다”고 했다.

2025 필드레코딩 워크숍 2에서 분수가 있는 수로 옆에서 마이크로 물소리를 채집하고 있다. [트랜지언츠 제공]
2025 필드레코딩 워크숍 2에서 분수가 있는 수로 옆에서 마이크로 물소리를 채집하고 있다. [트랜지언츠 제공]

한국예술종합학교 선후배 사이인 두 사람은 2023년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 사운드랩 연구원으로서 아시아의 도시들을 옮겨 다니며 소리를 주웠다. 그때의 경험이 이듬해 세운 트랜지언츠와 ‘소리 유목민’ 소닉 노마드의 뿌리가 됐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소리에 둘러싸여 살고 있는지 모르고 지낼 때가 많잖아요. 필드레코딩을 하다 보면 사실 굉장히 생명력이 넘치는 세상 속에서 내가 살고 있다고 느끼게 돼요.” (윤지영)

조예본도 윤지영의 이야기에 공감했다. 그에게 필드레코딩은 ‘소리를 채집하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매력적인 작업이다. 하나로 뭉뚱그려 들리던 소리가 저마다 다른 결로 갈라지는 순간, 온몸의 감각이 깨어난다.

“흔히 ‘새소리랑 비슷하겠지’, ‘물이 많은 공간의 소리겠지’ 하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그 소리들이 어떤 공간에 어떻게 존재하느냐에 따라 작은 차이를 만들어 내요. 자연의 소리는 엄청난 해상도를 지녀서, 범접할 수 없는 창조물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조예본)

들리지 않던 소리, 사라지는 소리

녹음 버튼을 누르는 순간은 두 사람이 조금 다르다. 윤지영은 여러 소리가 겹겹이 얽혀 ‘하나의 환경’을 이룰 때 “뭔가 재미있다, 이 상황을 담고 싶다, 기록하고 싶다”는 마음이 동한다. 조예본은 공간에 귀를 댄다. 같은 장소도 어제와 오늘, 낮과 밤에 따라 다르게 들린다. 장소가 바뀌는 순간엔 그 차이가 더 극적으로 드러난다. 서울 서리풀공원에선 숲이 소리를 빨아들이는 산길을 걷다가도, 두 발짝만 올라서면 고속버스터미널 재건축 공사 소리와 차 소리가 한꺼번에 되돌아온다. 공간이 바뀌는 생생한 경계를 조예본은 귀로 확인한다.

어떤 소리는 그 자체로 역사를 품는다. 시간이 흐르면 사라지기 때문이다. 트랜지언츠는 그 소리를 기록한다. 도시화와 기후변화로 사라지는 소리 풍경을 새기며, 사라진 소리를 기억하고 증언한다.

윤지영은 “서울 관악구의 한 시장 주변은 원래 물길이었다고 해요. 물소리가 흐르던 자리를 이제는 사람들의 소리가 채우고 있죠”라고 했다. 광주에선 재개발을 앞둔, 오래된 아파트에서 마지막까지 홀로 살던 할머니가 이사를 나가는 소리를 녹음했다. 그 아파트는 이제 철거됐다고 한다.

관객들이 스피커와 랜턴이 놓인 발전소 홀에서 빈백에 누워 소리를 듣고 있다. 2026 리스닝 라운지를 AI로 시각화한 연출 이미지. [트랜지언츠 제공]
관객들이 스피커와 랜턴이 놓인 발전소 홀에서 빈백에 누워 소리를 듣고 있다. 2026 리스닝 라운지를 AI로 시각화한 연출 이미지. [트랜지언츠 제공]

기록은 함께 쌓기도 한다. 트랜지언츠가 만든 필드레코딩 앱에선 누구나 지금 내가 딛고 선 곳의 소리를 녹음해 올리고, 다른 이들이 올린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서울의 공원에서 유럽의 거리까지, 소리가 녹음된 순서대로 쌓인다.

무엇을 담고 무엇을 흘려보낼지 고르는 건 결국 사람의 귀다. 윤지영은 “인간의 관점이라는 건 굉장히 편협하다”며 “사실 내 관점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고 했다. 그렇기에 기준을 만들어 둔다.

“최대한 인간의 입장이 아니라 그 소리의 주인, 그러니까 소리를 내는 생명체나 환경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려고 해요.” (윤지영)

조예본이 먼저 헤아리는 건 그곳에 머무는 사람들이다. 그는 “그 장소에서 오랫동안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신경 쓰게 된다”고 했다.

‘자연의 소리’도 기계가 흉내 낼 수 있는 시대가 됐다. 페스티벌 셋째 날인 오는 24일 라이브 무대로 공개되는 신작 ‘스침’엔 새소리를 학습한 인공지능(AI)이 만든 새소리도 들어간다. 두 사람은 “아직은 아니지만, 기계가 만든 새소리와 진짜 새소리를 점점 더 귀로 가려내기 어려워질 것”이라고 내다본다. 그럼에도 녹음기를 내려놓지 않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곳에 가 내가 들은 것을 AI가 대신해 줄 수는 없으니까요.” (윤지영)

혼자 듣는 시대, 함께 듣는 경험

50명이 들어가도 꽉 차던 연희동의 작은 공간. ‘소닉 노마드’는 이곳에서 태어났다. 이어폰을 꽂고 ‘나만의 세계’를 탐험하는 초개인화 시대에 ‘공동의 청취’를 들고 나왔다. 계기는 코로나19로 공연계가 셧다운됐을 때 찾아왔다. 독일 유학 중이던 윤지영은 학교 연주회 객석에서 잊고 있던 감각을 되찾았다.

“그때 음악을 크게 들은 지가 너무 오랜만이라는 걸 절감했어요. 음악은 원래 같이 크게 들을 때 의미를 가진다는 생각이 그때 들더라고요.”

이는 올해 페스티벌의 주제인 ‘함께 듣기(Listen with)’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무대는 1975년 지어진 서울대의 옛 보일러실로 옮겼다. 10m가 넘는 천장과 콘크리트 벽이 녹음된 장소의 소리 위에 이 공간의 울림을 한 겹 더 얹는다.

소리를 듣는 방식도 달라진다. 여덟 대의 스피커가 관객을 둘러싸고, 빈백 60개가 그사이에 흩어진다. 전형적인 전자음악 공연에는 ‘스위트 스폿’이 있다. 그 자리에 앉아야 작곡가가 의도한 소리를 온전히 들을 수 있는 특정 지점이다. 윤지영은 “그 스위트 스폿을 없앴다”며 “중앙에서 탈중앙으로 향해 음악을 듣는다”고 했다. 헤드폰을 쓰고 혼자 68편을 넘겨 듣는 리스닝 부스도 뒀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싶었다”는 이유에서다.

필드레코딩 워크숍에서 참가자들이 녹음기와 마이크를 들고 건물 앞에 모여 출발을 준비하고 있다. [트랜지언츠 제공]
필드레코딩 워크숍에서 참가자들이 녹음기와 마이크를 들고 건물 앞에 모여 출발을 준비하고 있다. [트랜지언츠 제공]

손톱 깎는 소리, 현금인출기의 전자음, 철거를 앞둔 을지로 인쇄소의 기계음도 이 공간에선 음악이 된다. 조예본은 “음악을 만들어 가는 데에는 재료의 제한이나 범위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나흘간의 페스티벌에서 두 사람이 꼭 들어 보라고 권하는 곡들이 있다. 바로 23일 딥 리스닝 세션을 여는 폴란드 스튜디오 전자음악의 원로 리디아 지엘린스카의 ‘인섹타리온’이다. 영국 작곡가 존티 해리슨의 ‘크러시드’는 아이슬란드의 녹슨 분쇄기와 먼 바닷가의 새 소리를 한 곡에 담았다. “거칠고 무거운 금속성 소리와 멀리 있는 새소리가 한 곡 안에서 어떻게 만나는지” 들어 보라는 게 두 사람의 권유다. 세션의 마지막은 “누구의 말도 곧이곧대로 믿지 말라”는 뜻의 라틴어 문구를 제목으로 삼은 미국 작곡가 로버트 스콧 톰프슨의 ‘눌리우스 인 베르바’가 맡는다.

두 사람이 가장 아끼는 곡은 영국 작곡가 피트 스톨러리의 ‘클레르몽 혼스’다. 자동차 경적을 겹겹이 쌓아 만든 곡이다. 조예본은 “편집이나 합성이 거의 없는 이 곡을 처음 함께 들었을 때 소름이 돋았다”고 했다. 이 곡을 들은 뒤로 윤지영에게는 작업실 창밖 경적도 다르게 들린다. “창문을 열어 두면 이곳 서초동에도 시끄러운 경적이 많이 들려요. 예전엔 무작정 듣기 싫은 소리였는데, 이 곡을 들은 뒤로는 덜 싫은 소리가 됐어요.” (윤지영)

조예본은 이 페스티벌이 ‘듣기’ 자체를 돌아보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 그는 “듣기가 무엇인지 한 번도 의식해 보지 못한 사람도 많을 것”이라며 “이 페스티벌에서 여러 가지 듣기를 경험해 보길 바란다”고 했다.

‘소닉 노마드’는 ‘소리 유목민’이라는 이름처럼 세계의 도시를 떠도는 페스티벌을 꿈꾼다. 윤지영은 “서구 중심의 음악 교육을 받다 보니 결국 서구에서 발전한 음악을 배우게 되고, 듣는 방식도 서구 중심이 됐다”며 “거기엔 어쩔 수 없이 제국주의적인 것이 묻어 있다. 그런 걸 최대한 덜어 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첫 행선지로 아시아의 도시들을 꼽는 이유다. 서울에서든, 아시아의 어느 도시에서든 두 사람이 귀 기울이는 건 작고 미약한 소리다. 윤지영은 그 소리에서 사람의 자리를 본다.

“사실 우리도 우리가 속한 환경에서 아주 미약한 존재예요. 주변을 듣고, 다시 그 주변에 속한 나 자신을 생각하게 되는 것. 그게 본질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윤지영)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