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여전히 찬란하게’ 송일곤 감독
참혹한 폭력 대신 서늘한 서스펜스
소녀들의 꿈으로 직조한 위로와 치유
“상처 보듬는 연대·공감의 서사 되길”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초승달 산 넘어 옛 마을 바람만 분다, 매화 진 길 위에 그리움 서리네.” (OST ‘찬란하게’ 중)
내일의 일상이 어떻게 저물지 모르던 시린 1942년의 겨울. 산정(山頂)에 오른 정임(최주은 분)이 고운 목소리로 한 음 한 음 디디듯 노래를 이어 간다. 그 곁을 지키는 건 단짝의 재능을 제 것인 양 아끼는 순옥(박서경 분). 열일곱 소녀들의 뺨엔 이내 옅은 봄이 번진다. 고요한 노랫말을 입안 가득 도르르 굴리고, 그 위로 티 없는 선율이 한 겹씩 덧입혀진다. 언젠가 서울로 가 한 사람은 가수가, 한 사람은 친구를 무대에 세우는 단장이 되리라. 참혹한 시대에도 끝내 스러지지 않은 희망의 떨림이다.
카메라는 그 얼굴들에 오래 머문다. 해사했던 얼굴 위로 깊은 주름이 내려앉으며 영화는 세 개의 시간을 오간다. 그 끝자락 어딘가에서 소녀의 얼굴은 노년의 순옥(김혜자 분)에게 가 닿는다. 수십 년의 간극에도 두 얼굴이 어긋나지 않는 건 한 사람의 생을 관통해 온 그리움이 그 사이를 잇고 있어서다.
지난 21일 개봉한 영화 ‘여전히 찬란하게’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다루지만, 위안소는 한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대신 영화의 시선은 ‘비극 이전’의 시간에 향해있다. 그 시절 티 없이 맑은 소녀들의 일상과 꿈은 익히 알고 있는 역사에 비로소 체온을 불어넣는다. 비극이 앗아간 것은 목숨과 자유만이 아니었다. 평범하고도 찬란했던 한 우주의 무한한 가능성이었다.
“위안부 이야기이기에 진입 장벽이 높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픈 이야기니까 아프게 봐야 한다’고 생각하면 보고 싶지 않잖아요. 아픈 소재를 다룬 작품들이 이미 있었기에, 굳이 그 이야기를 재연해서는 안 된다고 봤어요.”
영화는 1999년 단편 ‘소풍’으로 칸국제영화제 단편경쟁 부문 심사위원상을 받은 송일곤 감독이 긴 공백기 끝에 내놓은 이야기이자, 데뷔 65주년을 맞은 김혜자가 ‘길’(2017) 이후 9년 만에 택한 스크린 복귀작이다. 개봉 다음 날인 22일 서울 코엑스 메가박스에서 만난 송일곤 감독은 “두 소녀의 찬란했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아픔과 마주하게 되길 바랐다”고 말했다.
재연하지도, 메시지를 강요하지도 않는다
영화의 씨앗이 된 건 이혜숙 작가의 희곡 ‘오래된 사과’다. 모든 작품의 시나리오를 손수 써 온 송 감독이 다른 작가의 이야기로 메가폰을 잡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대본을 처음 펼쳤을 땐 소재가 주는 무게가 먼저 다가왔지만, 결국 그의 마음을 움직인 건 그 안에 담긴 “올곧고 선한 마음”이었다.
송 감독은 “역사적 사건은 문학이든 영화든 노래든, 다양한 시선과 형태로 다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그래야 그 사건을 통해 지금의 우리를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영화의 소재인 ‘위안부’는 오래도록 배우고 접해 온 고통스러운 역사이기에 송 감독은 원칙 하나를 세웠다. 고통을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송 감독이 선택한 건 사건의 앞과 뒤로 시선을 옮긴 것이다.
행복할 줄만 알았던 꽃청춘들의 삶은 어느 새벽, 아주 먼 곳에서 점처럼 다가오는 한 소녀로 인해 균열이 생긴다. 위안소로 끌려갔던 순옥의 사촌 언니 점례다. 넋이 나간 채 마을로 돌아온 점례의 얼굴은 화면 밖의 참상을 짐작게 하고, 소녀들에게 다가오는 어둠을 예고한다.
송 감독은 “다큐멘터리 속 푸티지(footage, 원본 영상)는 너무 끔찍하고 생생하다. 오히려 그 일을 겪고 돌아온 여성이 있다면 그분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그걸 그리는 게 중요하다고 봤다”며 “사건의 통증이 아니라 마음의 통증으로 전해지길 바랐다”고 들려줬다.
점례의 등장 이후 영화의 서사는 첫 번째 전환점을 맞는다. 내일을 꿈꾸던 소녀들의 일상이 무너진다. 그들의 공포는 관객들에게 소리로 전달된다. 소녀들이 숨은 화장막에 일본군이 들어서는 순간, 음악은 숨을 죽이고, 화면은 긴박한 기척들로 채워진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정임과 순옥. 떨어지는 낫을 소녀의 손이 가까스로 붙드는 찰나, 객석의 숨도 함께 멎는다.
송 감독은 “영화를 좀 더 장르적으로 즐길 수 있도록 배치했다”며 “영화를 대상화하거나 거리를 둔 채 메시지를 강요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고 했다. 훈계하는 목소리를 걷어 내고 치밀한 서스펜스를 덧입힌 연출 덕에, 관객은 폭력을 구경하는 자리에 앉지 않고 소녀들 곁에 나란히 웅크릴 수 있다.
“아이들이 무서울 땐 같이 무서워하고, 행복할 땐 같이 행복하길 바랐어요. ‘이 아이들이 잡혀가지 않았으면, 무사했으면’ 하고 응원하는 마음으로 봐주셨으면 했죠.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두려웠을까 하는 마음으로요.”
풍경보다 얼굴, 시대보다 사람
공포가 지나간 자리에도 소녀들은 노래한다. 송 감독이 이 영화에서 가장 공들인 것은 ‘핍진성(逼眞性)’이었다. 관객이 실제처럼 믿게 되는 힘이다. 소녀들의 꿈을 그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막연한 공상이 아니라 손에 잡히는 바람으로 그려내고자 했다. 송 감독은 “그렇게 고통스러운 시절에도 아이들은 꿈을 잃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게 가슴 아프기를 바랐다”고 했다.
뮤지컬 장면을 넣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현장에서 ‘순정두’(순옥·정임·두영)로 불린 세 소년·소녀가 곱게 차려입고 노래하는 장면(‘서울에 가면’)은 셋이 꿈꾸던 서울을 눈앞에 불러낸 가상의 무대다.
“더 넓은 세상에 나가고 싶고,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잖아요. 그 시절 아이들도 지금의 우리와 다르지 않았어요. 이 아이들이 지금 태어났다면, 좋은 부모 밑에서 좋은 나라에 태어났다면 블랙핑크가 될 수도 있었을 거예요. 그래서 이 장면은 판타지가 아니라 굉장히 현실적인 장면이라고 생각해요. 꿈과 그 꿈을 허락하지 않았던 현실의 거리가 보이니까요.”
영화는 1942년과 1991년, 2010년을 한 올 한 올 엮어 간다. 1991년을 중간에 둔 데엔 이유가 있다. 고(故)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처음으로 공개 증언한 해이기 때문이다. 송일곤 감독은 “현재와 과거, 그보다 더 먼 과거를 어떻게 짜맞출지, 엔딩에서 모든 이야기의 진실이 드러날 때 그 시간과 기억을 어디에 놓아야 할지를 가장 오래 고민했다”고 돌아봤다.
세 시간을 잇는 건 얼굴이다. 가늘게 흔들리는 속눈썹, 미세하게 떨리는 입매, 설렘과 두려움, 기쁨과 슬픔이 저마다 다르게 어린 검은 눈동자들…. 카메라는 유달리 배우들의 얼굴에 초점을 맞춘다. 송 감독은 이 영화를 ‘인물화’라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물화를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사람의 감정과 기억이 보여요. 소녀들이 숨어 지내는 화장막은 아주 좁아요. 추운 겨울의 추레한 은신처를 예쁘게 보여 줄 수는 없었어요. 풍경 대신 얼굴로 그들의 감정을 보여 주고 싶었어요.”
감독이 가장 아끼는 장면도 그렇게 태어났다. 순옥이 시집가게 됐다며 두 소녀가 마주한 자리, 바람 소리만 오가는 공간에서 친구를 두고 떠나야 하는 마음이 두 얼굴에 고인다. 송 감독은 소녀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아이들”이라고 했다.
그 얼굴들의 한가운데에 배우 김혜자가 있다. 마지막 드라마를 끝내고 “들꽃처럼 조용히 지내고 싶다”던 배우는 젊은 세대가 꼭 봐야 할 이야기라는 감독의 오랜 설득에 마음을 돌렸다.
송 감독은 “영화의 출발 자체가 두 소녀의 60년 넘는 이야기이기에 캐스팅이 정말 중요했다”며 “김혜자 선생님의 압도적인 존재감, 대한민국 사람들의 유전자에 새겨진 선생님의 이미지가 있다. 인간에 대한 연민과 따뜻한 사랑, 우리들의 어머니이자 누나이자 친구라는 그 모든 이미지가 내포된 분”이라고 말했다.
“선생님이 엔딩에서 ‘하루하루는 지독시리도 안 가는데, 10년 20년은 금방 지나가’라는 대사를 하시는 클로즈업이 있어요. 찍는 내내 전율이 왔어요. 대배우만이 보여 줄 수 있는 얼굴이었죠.”
118분 동안 영화는 비극을 소리 높여 외치지 않는다. 그저 노래하던 소녀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게 한다. 송 감독은 “요즘은 썰고 찌르고 죽이고 더 자극적인 것으로 흐르는 도파민의 시대다. 그렇기에 오히려 반(反) 도파민의 영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노래는 영화의 처음과 끝을 꿰고, 기억은 노랫말처럼 입에서 입으로 건너간다. 영화 제목에도 그 마음이 담겼다. 송 감독은 “‘여전히’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 주는 단어”라며 “기억하지 않으면 존재는 사라진다. 기억해야만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아이들의 찬란했던 시절이 얼마나 소중한지 기억해야만 과거의 아픈 이야기도 기억할 수 있다고 내내 생각했어요.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와 다르지 않았으니까요. 그 시절을 기억해야 우리는 다시 비극을 맞지 않을 수 있고, 비극 앞에 서더라도 연대하고 공감하면 그 상처도 치유될 수 있지 않을까요.”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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