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8년, 웹툰 29억 뷰, 실사화
서양식 이름·궁정 그대로 옮긴 정공법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이혼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재혼 승인을 요구합니다.”
황제에게 버림받은 황후가 판을 뒤집는 순간이다. 2018년 웹소설로 처음 세상에 나온 이 문장은 ‘재혼 황후’를 상징하는 대사가 됐고, 디즈니+는 이 문장을 티저 포스터 카피로 그대로 내걸었다. 웹소설과 웹툰으로 8년을 달려온 한 줄이 배우의 목소리로 발화되자 안방이 들썩였다.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재혼 황후’가 지난 3일 1~4회를 공개했다. 동대제국의 황후 나비에(신민아 분)가 도망 노예 라스타(이세영 분)에게 빠진 황제 소비에슈(주지훈 분)로부터 이혼을 통보받자, 이를 수락하는 대신 서왕국 왕자 하인리(이종석 분)와의 재혼 승인을 요구하는 이야기다. 네이버웹툰의 동명 웹툰이 원작으로, 한국 로맨스 판타지(로판)의 대표 IP를 본격적으로 실사화한 첫 사례로 꼽힌다.
공개 과정부터 이례적이었다. 당초 공개일은 4일이었으나, 디즈니+는 3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콘래드 서울에서 열린 제작발표회 현장에서 공개를 하루 앞당긴다고 깜짝 발표했다. 지난달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작품을 먼저 본 관객들의 호평과 빠른 공개 요청을 반영했다는 설명이다. 조수원 감독은 “제작발표회 당일 오픈을 한다니까 더 의미가 있다”고 했다. 홍보 일정이 이미 짜인 상황에서 공개 하루 전 날짜를 바꾸는 일은 OTT 업계에서도 드물다. 플랫폼이 작품에 거는 기대가 그만큼 크다는 방증이다.
29억 뷰가 먼저 깔아 둔 길
‘재혼황후’는 강력한 슈퍼IP다. 원작들이 깔아놓은 숫자가 압도적이다. 알파타르트 작가의 원작 웹소설은 2018년 11월 네이버시리즈에서 연재를 시작해 누적 다운로드 1억6000만 건을 넘겼다. 2019년 히어리(글)·숨풀(그림) 작가가 옮긴 웹툰은 영어·스페인어·일본어 등 10개 언어로 서비스되며 올해 7월 기준 글로벌 누적 조회수 29억7000만 회를 기록했다. 드라마 제작이 공식화된 지난해 4월 당시 집계는 약 26억 회(2024년 12월 기준)였다. 1년 반 남짓한 사이 3억 회 이상이 더 쌓였다.
검증된 팬덤은 공개 전 지표로 고스란히 옮겨 왔다. 지난 8월 공개된 티저 예고편은 24시간 만에 조회수 1170만 회를 넘기며 디즈니+ 한국 오리지널 시리즈 예고편 가운데 최고 기록을 세웠다. 9월 메인 예고편은 48시간 만에 1300만 회를 찍었다. 컨슈머인사이트가 지난달 21일 내놓은 ‘10월 4주 차 OTT K-오리지널 콘텐츠 시청자 평가 리포트’에서는 시청의향률 22%로 조사 대상 작품 가운데 1위에 올랐다. 부산국제영화제 ‘온 스크린’ 섹션의 월드 프리미어 상영은 예매가 열리자마자 전석 매진됐다.
원작도 드라마와 발을 맞춘다. 네이버웹툰은 지난달 29일부터 ‘재혼 황후’ 외전 연재에 들어갔고, 네이버시리즈는 오는 7일 하루 동안 원작 웹소설 전 회차를 무료로 푼다. 드라마가 원작 독자를 불러 모으고, 원작이 다시 드라마 시청자를 끌어들이는 IP 선순환이다.
무너지지 않는 황후, 로판의 문법
사냥터에서 도망치던 노예를 데려온 황제는 그 여인을 정부(情婦)로 들이겠다고 선언한다. “설렘이란 게 뭔지 처음 알았다”는 황제 소비에슈의 고백은 나비에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힌다. 라스타는 해맑은 얼굴로 “언니라고 불러도 괜찮을까요?”라며 황후와 나란히 서려 한다. 신종 발암 캐릭터의 증당이다. 1~4회는 신년제를 기점으로 벌어지는 황제 부부의 균열, 나비에를 향한 하인리의 거침없는 직진, 하인리가 찾는 비밀 편지 친구 행세를 하는 라스타의 거짓말까지 숨 가쁘게 몰아친다.
겉보기엔 익숙한 불륜 서사다. 하지만 로판 독자들이 ‘재혼 황후’에 열광한 이유는 따로 있다. 동대제국의 황후 나비에는 울며 매달리지도, 복수를 위해 다른 생으로 되돌아가지도 않는다. 회귀·빙의·환생이 로판의 단골 장치로 자리 잡는 사이, ‘재혼 황후’는 초월적 장치 하나 없이 이혼마저 정치적 결단으로 바꾸는 황후의 선택만으로 이야기를 밀고 나간다. 버려지는 여성이 아니라 스스로 다음 자리를 고르는 여성. 로판이 웹소설 시장에서 쌓아 온 ‘주체적 여주인공’ 서사의 전범(典範)으로 이 작품이 거론되는 까닭이다.
신민아는 제작발표회에서 나비에를 “황후로서 흔들리지 않으려고 하지만 한 여성으로서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주체적인 인물”이라고 정의했다.
‘재혼황후’와 같은 웹소설 서사를 읽는 시장의 덩치도 커졌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2024 웹소설 산업 현황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4년 국내 웹소설 시장 규모는 1조3500억 원으로, 2년 전보다 3110억 원 늘었다.
‘어색함’의 벽 VS ‘로맨타지’의 문
로판은 웹툰 시장의 강자였지만 오랫동안 실사화의 불모지로 남아 있었다. 한국 배우가 서양식 드레스를 입고 ‘나비에’, ‘소비에슈’ 같은 이름을 부르는 순간 몰입이 깨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제작 초기엔 배경을 동양으로 옮길 것이란 관측까지 나왔다. 제작진은 정공법을 택했다. 이름과 세계관을 원작 그대로 두고, 프랑스·독일·체코의 성을 답사한 끝에 독일 슐라이스하임 궁전을 주요 촬영지로 골랐다. 지난해 11월 첫 스틸 공개 직후 소비에슈의 훈장 소품이 나치 훈장과 닮았다는 지적이 나와 제작사 스튜디오N이 사과하는 곡절도 겪었다.
관건은 드라마의 톤을 맞추는 것이었다. 조수원 감독은 “웹툰은 밝고 잔망스럽다. 그 안에서 중간을 설정해서 톤을 잡으려고 노력했다”고 털어놨다. 낯선 가상 세계가 한국 시청자에게 의외로 친숙하게 읽히는 이유는 주지훈이 짚었다. 존재하지 않는 세계지만 사극의 말투와 인물 관계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부산에서 작품을 먼저 본 관객들 사이에서도 처음 몇 분의 어색함만 넘기면 금세 빠져든다는 반응이 이어졌다.
해외에서도 ‘로판’ 장르는 낯설지 않다. 영미권 출판 시장은 판타지와 로맨스를 결합한 ‘로맨타지(romantasy)’ 열풍의 한복판에 있다. 대표작 ‘포스 윙(Fourth Wing)’은 1200만 부 넘게 팔렸고, 아마존 프라임비디오는 지난 5월 시리즈 제작을 확정했다. 그러나 미국 매체 인버스는 정통 로맨타지가 스트리밍에서 아직 제대로 성공한 적이 없다고 짚었다. ‘재혼 황후’는 ‘한국산 로판’으로 여러 시장을 두드리고 있다.
평가는 화려한 외피와 인물의 깊이 사이에서 갈린다. 미국 매체 스크린랜트는 초반 3회를 보고 10점 만점에 9점을 매기며 ‘2026년 최고의 K-드라마’ 후보로 꼽았다. 콜라이더는 7점을 주며 신민아의 연기를 작품의 심장으로 치켜세웠지만, 초반 전개의 느린 호흡과 소비에슈의 갑작스러운 변심은 설득력이 약하다고 봤다. 리오투스는 “또 다른 세계를 마주한 듯 인물들의 감정 하나하나에 빠져든다”고 했다.
‘재혼 황후’의 성적표는 한 작품의 흥행에 그치지 않는다. ‘하렘의 남자들’, 김태리 주연의 ‘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 등 서양풍 로판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들이 영상화를 기다리고 있어서다. 남은 6회는 오는 11일부터 매주 수요일 2회씩 공개되며, 25일 마지막 회로 막을 내린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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