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50주년 맞은 76세 일본의 전설
“달라진 모습 보이기 싫어” 한때 은둔
이노키 당당한 투병 모습에 생각 바꿔
[헤럴드경제=조용직 기자] 얼마나 쇠처럼 쉰 목소리로 쩌렁쩌렁 일본 프로레슬링계를 호령했던 빅스타가 이제는 휠체어에 앉아 팬들을 만난다. 링 위에서 상대를 거칠게 몰아붙이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처음에는 그런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과거 링에서 맞붙었던 또 다른 전설이 그에게 용기를 줬다.
일본 프로레슬링의 살아 있는 전설 텐류 겐이치로(76)가 데뷔 50주년을 맞아 자신의 선수 생활과 은퇴 이후의 삶을 돌아봤다. 일본 도쿄스포츠가 지난 1일 공개한 특별 인터뷰에서 텐류는 휠체어 생활을 받아들이게 된 계기로 선배 고(故) 안토니오 이노키를 꼽았다.
텐류는 처음 휠체어에 의지하게 됐을 때 예전과 달라진 모습을 팬들에게 보여주기 싫었다고 털어놨다. 강인한 프로레슬러로 기억되던 자신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움직이는 모습을 공개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생각을 바꾼 계기는 이노키의 말년이었다. 이노키는 희귀질환인 전신성 아밀로이드증과 싸우면서도 쇠약해진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 휠체어를 타거나 병상에 누운 모습까지 공개하며 팬들과 소통했다. 2022년 10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신이 처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텐류는 그런 이노키를 보면서 휠체어를 탄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설명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욱 인상적인 고백이다. 텐류는 자이언트 바바를 계승하는 젠니혼 프로레슬링(AJPW) 출신이고, 이노키는 역도산을 이어 신일본 프로레슬링(NJPW)를 설립한 인물로, 양대 라이벌 단체를 대표한 레슬러였다.
텐류는 1994년 1월 도쿄돔에서 이노키와 맞붙어 핀폴 승리를 거뒀다. 그는 자이언트 바바와 이노키를 모두 핀폴로 꺾은 드문 기록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링에서는 이노키를 쓰러뜨렸지만, 세월이 흐른 뒤에는 그에게서 인생의 중요한 교훈을 얻은 셈이다.
1950년생인 텐류는 스모 선수로 활동하다 1976년 11월 13일 미국 텍사스에서 프로레슬러로 데뷔했다. 이후 전일본 프로레슬링과 신일본 프로레슬링 등을 무대로 활약하며 일본 프로레슬링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특히 점보 츠루타와 벌인 격렬한 대결은 지금도 일본 프로레슬링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승부로 꼽힌다. 텐류는 이번 인터뷰에서 당시 경기를 돌아보며 지금 생각하면 무모할 정도로 몸을 혹사했다고 회상했다. 현재 휠체어에 의지하는 처지가 됐지만, 특유의 거친 유머도 잃지 않았다. 츠루타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자신은 살아 있으니 결국 자신이 이긴 셈이라는 농담까지 던졌다.
텐류는 2015년 11월 오카다 가즈치카와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이후에도 프로레슬링계와 인연을 이어갔지만 건강 문제는 피할 수 없었다. 2023년에는 목뼈의 불안정성과 척수증, 척추관협착증 등으로 입원 치료를 받았다. 이후 휠체어를 이용하며 재활을 이어가고 있다.
그의 딸이자 텐류 프로젝트 대표인 시마다 아야나는 지난해 6월 공개한 글에서 아버지의 일상을 소개했다. 아야나에 따르면 텐류는 휠체어 생활을 하면서도 매일 재활과 보행 훈련을 이어갔다. 가족에게도 쉽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딸은 아버지의 현재 모습 역시 평생 프로레슬링에 헌신해 온 삶의 흔적이라고 받아들였다.
텐류 자신도 프로레슬러로 살아온 인생을 부정하지 않았다. 도쿄스포츠가 프로레슬링 선수가 된 것을 후회한 적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단 한 번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자신을 세상에 알린 것이 프로레슬링이라며 감사한 마음도 전했다.
은퇴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프로레슬링을 향한 관심은 여전하다. 텐류는 최근 경기에서 관객의 웃음이나 순간적인 반응을 끌어내는 연출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을 아쉬워했다. 대신 선수들이 기본 기술과 치열한 공방만으로 관객을 사로잡는 경기를 높이 평가했다.
지난 8월 신일본 프로레슬링 G1 클라이맥스 결승에서 오이와 료헤이와 우에무라 유야가 보여준 경기가 대표적인 사례였다. 헤드록과 관절기 등 기본 기술을 중심으로 전개된 승부에 관중이 열광하는 모습을 보며 기뻤다고 밝혔다.
텐류에게 프로레슬링은 은퇴와 함께 끝난 과거가 아니라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삶의 일부다. 그의 데뷔 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도 시작됐다. 텐류 프로젝트는 이달부터 내년 6월까지 약 8개월 동안 영상 제작과 전시, 대담 등 다양한 기념사업을 추진한다. 기념사업에 내건 메시지는 ‘사람은 몇 번이고 다시 꽃필 수 있다’는 것이다.
50년 전 링에 첫발을 내디뎠던 청년은 이제 휠체어에 앉아 자신의 역사를 돌아본다. 몸은 예전 같지 않지만 프로레슬링에 대한 자부심만큼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노키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모습을 숨기지 않았던 것처럼, 텐류 역시 달라진 모습 그대로 팬들 앞에 서고 있다. 그에게 데뷔 50주년은 지나간 영광을 기념하는 자리이자 은퇴 이후에도 계속되는 삶을 보여주는 무대다.
yj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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