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부터 18년간 뉴스위크 칼럼 논쟁
인플레, 재정 정책필요 vs 자유시장의 힘
‘케인스주의’ 세금올려 성장속도 억제
‘통화주의 ’정부개입 할수록 성장 저해
상대방 공은 인정…객관적·이성적 논박
학문적 과정·교류 치밀하게 재연 눈길
케인스주의자 폴 새뮤얼슨과 통화주의자 밀턴 프리드먼은 현대경제학의 거두이자 라이벌이다. 둘은 경제학의 전통적 화두인 시장과 정부의 역할에 대해 상반된 입장을 견지했고, 놀랍게도 18년간 논쟁을 이어갔다.
경제학계 숙명의 라이벌인 존 M. 케인스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격돌을 그린 전작 ‘케인스 하이에크’로 화제를 모은 바 있는 저널리스트 니컬러스 웝숏이 이번에 그 후속작이랄 대립되는 두 인물을 다룬 ‘새뮤얼슨 vs 프리드먼’(부키)으로 돌아왔다.
1966년부터 18년 동안 뉴스위크의 칼럼을 번갈아 쓰며 세기의 논쟁을 벌여온 둘의 핵심 쟁점은 인플레이션의 원인과 해결책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20년 동안 안정적으로 유지되던 미국의 물가 상승률은 60년대 말 치솟기 시작했고 경제학자들에게로 시선이 쏠렸다.
케인스주의자들은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원인을 경제가 성장하면서 수요가 증가한 결과로 봤다. 하지만 인플레이션과 함께 경기 침체 현상도 나타나는 스태그플레이션에 대해선 설명할 수 없었다. 새뮤얼슨은 나중에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이 케인스주의의 관에 대못을 박았다”고 돌아봤다.
60년대 말 시작된 인플레이션은 1970년 4%대에서 예상을 훌쩍 뛰어넘어 1975년에는 11.8%로 뛰어올라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
통화주의자 프리드먼과 케인스주의자 새뮤얼슨의 논쟁이 길어진 데는 이런 불안한 물가 상승이 오래 이어진 탓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새뮤얼슨의 해결책은 늘 그렇듯 재정정책이었다. 세율을 올리거나 정부 지출 비율을 줄이는 두 가지 방법을 인플레이션 해결책으로 제안했다. 마지못해 통화정책도 가능하다고 덧붙였는데, 물가상승률과 고용률이 모두 높은 상태라면 이자율을 올려 기업 활동을 늦추는 것을 고려할 수 있다고 했다.
새뮤얼슨은 연준이 이자율을 올려 성장 속도를 늦추는 것보다 정부가 세금을 올려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방식이 더 낫다고 봤다. 이자율이 높아져 차입 비용이 늘어나면 건설 및 주택업과 낮은 이자율로 돈을 빌려 집을 산 주택 구입자들이 타격을 받기 때문이다.대신 세금을 더 걷어 공공지출을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면 파괴적 인플레이션으로부터 빈곤층과 소외계층을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금을 올리는 일은 정치인들에게는 반가운 해법이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1967년 전미경제학회 강연을 시작으로 프리드먼의 통화주의가 힘을 얻기 시작했다. 프리드먼은 인플레이션은 언제 어디서나 화폐적 현상으로 봤다. 통화량이 경제 성장 속도보다 빠르게 증가하면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프리드먼은 통화가 경제 성장을 촉진하거나 늦추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봤다. 케인스주의에 밀려 오랫동안 무시당한 화폐수량설을 다시 살려낸 것이다.
프리드먼은 인플레이션에 대한 해법으로 연준 이사들의 재량권을 없애고 미리 정한 준칙에 따라 통화 정책을 펼 것을 제안했다. 다만 통화량 변화율이 경제활동이나 물가에 반영되기까지는 6개월에서 1년 반이 소요된다고 제시했다.
프리드먼은 물가 변화율이 안정적이고 충분히 예측 가능한 경우라면 물가가 오르든 내리든 경제는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고 봤다. 문제는 물가가 예측 불가능하고 변덕스러운 상황으로, 이는 경제 성장 뿐 아니라 경제 안정성까지 위협한다. 따라서 물가를 장기적으로 안정시키기 위해 통화량을 매년 3~5% 정도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이렇게 하면 물가가 조금씩 안정적으로 상승해 기업 환경의 확실성이 높아진다고 봤다.
프리드먼은 총수요에 효과를 내는 유일한 방법은 통화량 변화율 밖에 없다며, 재정 정책 자체는 효과가 거의 없다고 강조했다.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는 수많은 요인 중 통화량 증가만 근본 원인이라는 프리드먼의 독단은 새뮤얼슨은 물론 통화주의자들로부터도 비판을 받았다.
자유시장의 힘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으로 믿은 프리드먼은 정부가 개입할 수록 더 꼬이고 경제성장을 저해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 세기의 논쟁은 ‘타임’에 맞서 혁신과 진보적 언론으로 거듭나려는 ‘뉴스위크’의 야심찬 기획에서 비롯됐다. 맞수가 결정된 과정도 흥미롭다. 뉴스위크는 새뮤얼슨을 먼저 칼럼니스트로 섭외하고, 보수 쪽을 대변할 학자로 프리드먼에게 칼럼을 제안했다. 프리드먼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친구 새뮤얼슨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새뮤얼슨이 제안을 강력히 권고했다는 것이다. 새뮤얼슨은 보수 진영 가운데 강력한 맞수로 프리드먼을 인정한 것이다.
상대방의 공을 인정하고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논박하는 논쟁의 전범을 보여주는 책은 둘의 학문적 과정과 교류를 한 줄기로 치밀하게 재연해 낸 점이 눈길을 끈다. 특히 주요 논쟁 뿐 아니라 흥미로운 일화와 이론을 현실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케네디, 닉슨, 카터 대통령과의 갈등 등 평전 둘을 함께 읽는 듯한 재미를 준다. 60,70년대 논쟁이지만 여전히 현재에도 교훈을 준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새뮤얼슨 프리드먼/니컬러스 웝숏 지음, 이가영 옮김/부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