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톨리아 문명부터 오스만 제국까지

동서양 넘어, 1만2천년 중동문명 복원

농경보다 앞선 신전 문명도시 존재

약자 편 정의사회 함무라비 법정신,

페르시아 관용정책 오늘에 시사점

두 문명 대등하게 봐야 이슬람 이해

[북적book적]지역사에서 인류본사로…중양(中洋)의 눈으로 다시 쓴 문명사
“페르시아가 서쪽으로 팽창을 계속하려면 그리스 본토의 폴리스들과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스 본토의 폴리스 역시 자신들의 핵심적 물자 공급지인 아나톨리아반도를 빼앗길 수 없었다. ‘페르시아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배경이다.”(‘인류본사’에서). 사진은 고대 페르시아의 수도 페르세폴리스의 성벽.

기원전 1450년경 산토리니 섬의 화산 폭발, 크레타 섬의 미노아 문명 몰락, 트로이 전쟁과 아마존왕국 멸망, 히타이트와 이집트의 카데시 전투, 모세의 출애급, 페니키아 해상왕국, 프리기아 왕국의 등장과 미다스 신화, 헤브라이 왕국의 건설.

고대 오리엔트의 10대 역사적 사건이라 할 만한 이들이 별개가 아니라 서로 연결돼 있다면?

이슬람 문화에 관한 한 국내 최고 전문가인 이희수 한양대 명예교수는 이들을 단절된 사건이 아닌 상호 유기적으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연결된 하나의 역사방정식으로 본다.

말하자면 그리스 본토와 크레타 섬 사이에 있는 산토리니섬의 대폭발에 따른 생태계 교란으로 주변이 생존의 위협을 받게 되면서 비옥한 오리엔트를 향한 정복전쟁, 즉 트로이전쟁이 벌어지고, 그 결과 연쇄적으로 제국들의 흥망으로 이어졌다는 가설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아나톨리아반도가 있다.

세계사를 동양과 서양이라는 이분법을 넘어 ‘중양(中洋)’이란 통합과 교류의 개념으로 이슬람 문명을 새롭게 기술하는 움직임 속에서, 이희수 교수가 ‘인류본사’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이슬람문명사를 펴냈다. ‘본사(本史)’란 인류 역사의 뿌리라는 의미이다.

[북적book적]지역사에서 인류본사로…중양(中洋)의 눈으로 다시 쓴 문명사

최근 고고학적 발굴은 메소포타미아 문명 훨씬 이전에 문명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1만2000년 전 초고대 아나톨리아 문명과 히타이트, 프리기아 등의 문명이 중동지역에서 오랫동안 꽃피웠지만 이 지역은 오랫동안 외면당한 채 지역사로 치부돼왔다.

이 교수는 40년 이슬람 문명 연구의 결정체인 이 책에서 아나톨리아 문명부터 근대 오스만 제국까지 오리엔트-중동 1만2000년 문명사를 오롯이 담아냈다. 역사학의 근간을 뒤흔든 괴베클리 테페와 차탈회위크 유적으로 대표되는 아나톨리아 문명을 시작으로 바빌로니아,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사산조 페르시아 등 고대 중동을 호령한 바빌로니아-페르시아 문명,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히타이트, 프리기아, 파르티아 등 오리엔트 문명의 주요 제국들의 역사를 온전히 조명해낸다.

아나톨리아 문명의 실체가 확인된 건 2014년 터키 하란 고원 일대에서 거대한 신전 도시가 발굴되면서다. 독일 고고학자 슈미트팀이 발굴한 괴베클리 테베(배불뚝이 언덕)는 신전으로만 구성된 도시로,구조물의 분석 결과 1만2000년 전에 세워진 것으로 드러났다. 농업혁명이 일어나기 훨씬 전으로, 채집· 수렵시대에도 대규모의 도시공동체와 문명이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고대 도시문명이 농경 정착시대의 산물이라는 기존의 이론을 깬 것이다. “종교적 의례가 농경보다 앞선 문명의 시발점이었을 수 있다는 가설”이 설득적이다.

터키 중부 도시에서 발굴된 해발 1000미터 언덕 위에 형성된 계획도시 차탈회위크 역시 아나톨리아 문명의 일단을 보여준다. 기원전 7500년에서 기원전 5700년까지 형성된 신석기시대 마을로 밀, 보리 등 곡식의 낱알과 동물을 사육한 흔적이 발견됐는데 집마다 모두 북쪽 벽에 뿔 달린 황소의 머리를 건 게 특징이다. 소는 차탈회위크에서 중요한 의례의 상징이자 최고신이었음을 의미한다. 이 황소 숭배 신앙은 고대 이집트의 아피스 신화로 이어지고 그리스-로마 중심의 지중해 문명권으로 널리 퍼졌다.

저자는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 강 상류의 아나톨리아 문명과 하류의 기원전 3500년 수메르 문명 이 탄생하기까지 긴 공백을 풀어줄 단서들이 두 강 사이에 자리 잡은 중간도시들, 지금의 시리아에 산재해 있을 것으로 본다.

고대 오리엔트 문명제국들의 역사를 한줄로 꿰어내며 주요 사건에 대한 저자의 역사적 평가와 해석은 귀기울일 만한 게 많다.

근대법의 초석을 제공한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의 법정신을 새롭게 해석한 것도 눈길을 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알려져 있는, 흔히 반인권적 법의 대명사로 인식되지만 저자는 법의 평등과 보복의 대상과 범위를 규정한 것 등 약자가 고통받지 않는 정의로운 사회 구현의 기본정신을 읽어낸다.

“‘게르만인은 모두가 자유롭고, 라틴인은 일부가 자유로우며, 오리엔트에서는 한 사람만 자유롭다’라며 제왕적 절대 권력체계가 오리엔트의 특징이라고 강조해온 서구 오리엔탈리스트들의 편견을 이제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한 키루스 2세의 복속민에 대한 차별없는 다문화 관용정책은 오늘날의 시각으로 봐도 놀랍다. 저자는 이 관용정책이야말로 페르시아 제국의 번영의 토대라고 강조한다. 그 사례 중 하나가 유대인의 바빌론 유수를 끝내고 해방시킨 사건이다. 키루스왕은 칙령을 통해 끌러온 유대인의 노임을 계산해 챙겨주고 신전 건설 비용까지 대줬다.

사산조 페르시아가 멸망하고 역사의 주도권이 페르시아인에서 아랍인으로 넘아가며 이슬람의 황금기를 구가한 압바스 제국과 학문과 과학,문화, 예술의 중심 수도 바그다드, 바그다드에 버금가는 중앙아시아 티무르 제국의 수도 사마르칸트, 이란 시아파의 자존심 사파비 왕조,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함락 등으로 이어지는 이슬람의 화려한 역사가 한눈에 잡힌다. 유럽은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으로 오스만제국의 새로운 문명을 급속히 수용, 중세가 끝나고 르네상스가 시작되며 지리상의 발견이란 대항해시대가 열린다.

책은 서양 중심의 역사에서 벗어나 대등한 입장에서 고대 오리엔트를 조망, 인류역사의 전체상을 균형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이끈다. 또한 로마에 대항한 파르티아, 동로마에 맞선 사산조 페르시아의 문명사적 역할과 의미 등 두 문명 간의 충돌 속에서 이슬람이 일어나는 시공간적 맥락을 제시한다.

각 나라만의 정치적 맥락 안에서 구성된 통치체제와 제국을 존속시킨 또 다른 축인 종교와 문화예술에 대한 깊이있는 해석, 상세한 지도와 사진, 현장 답사기 등으로 풍성함을 더했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인류본사/이희수 지음/휴머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