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RA 세액공제 대상 15종 불과…美 브랜드 독차지
미국 친환경차 시장 현대차·기아 점유율 타격 우려
조지아 공장 조기 건설·녹다운 방식 생산 등 가능성
노조와 합의되면 앨라배마 공장서 전기차 생산 가능
[헤럴드경제=원호연 기자] 미국 내에서 생산된 전기차만 보조금 혜택을 주는 인플레이션 감축법안(IRA)이 시행되면서 현대차그룹이 위기에 처했다. 사실상 미국 브랜드의 전기차가 보조금 혜택을 독차지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보조금 대신 차량 가격을 할인해 줄 경우 수천억원대의 추가 마케팅 비용이 불가피하다. 노조와 합의를 통해 미국 내 전기차 생산을 앞당겨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17일(현지시간) 미국 연방국세청(IRS)는 현재 미국 시장에 출시한 친환경차 중 IRA 법안에 따라 세액 공제를 받을 수 있는 차종을 공개했다. 기존에 72개 차종이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었지만, 법안 시행 후 그 숫자는 21종으로 줄었다. 이 중 친환경차의 대표주자로 꼽히는 순수 전기차만 꼽으면 단 15종(연식별)에 불과하다.
브랜드별로 살펴보면 테슬라가 현재 판매 중인 전기차 4개 모델이 모두 세액 공제를 받아 가장 많은 수를 차지했다. 다만 테슬라가 판매하는 전기차는 차량에 따라 미국 밖에서 생산돼 역수입된 경우가 많아 차량 별로 따져봐야 한다. 쉐보레 볼트 EV, 볼트EUV, 캐딜락 리릭 등 3개 차종이 세액공제를 받는 제너럴모터스(GM) 그룹과 EDS, R1S, R1T 등 생산 중인 전 모델이 수혜를 받는 리비안이 그 뒤를 이었다. 포드와 루시드 역시 각 1종의 전기차가 세액 공제를 받는다. 닛산과 메르세데스-벤츠를 제외하면 미국 브랜드가 세액공제 혜택을 독차지한 것이다.
반면 현대차와 기아, 포르쉐, 토요타 등 유력한 자동차 브랜드의 전기차에 대한 세액 공제 혜택은 이번 법안 시행으로 중단됐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표면적으로는 중국에 대한 견제를 내세운 IRA 법안이 실질적으로는 현대차·기아와 폭스바겐 등 글로벌 완성차 업체에 점유율을 빼앗기고 있는 자국 완성차 업체를 지원하기 위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제기되고 있다. 이번 법안이 바이든 행정부와 미국 민주당의 최대 정치적 업적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이 같은 결과는 IRA 법안이 통과되면서 예견된 결과다. 인플레이션 감축법은 미국 현지에서 최종 조립된 전기차에 한해 북미 또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국가에서 제조·조립된 배터리 부품과 핵심 광물의 사용 비율에 따라 세액을 최대 7500달러까지 차등 공제해 준다. 오랜 기간 미국 내에서 부품 공급망을 구축해 온 미국 브랜드가 아니면 이 조건을 달성하기가 쉽지 않다.
최근 친환경차를 앞세워 미국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낸 현대차와 기아는 당장 타격이 클 수밖에 없다. 현대차와 기아는 국내 생산 전기차의 보조금 혜택이 사라지는 만큼 향후 미국 전기차 시장 점유율이 축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차와 기아의 상반기 친환경차 판매량은 9만691대(현대차 4만7598대, 기아 4만3093대)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82.1% 증가했다. 전기차 시장 점유율도 9%로 테슬라(70.1%)에 이어 2위를 달리고 있다.
현대차는 11월부터 앨라배마 공장 라인 전환을 통해 GV70 전기차를 연말부터 생산할 계획이지만, 2025년 완공될 조지아 전기차 공장 가동이 시작돼야 본격적으로 전기차 공급이 가능하다. 내년에 아이오닉6와 EV9 등 신규 전기차 라인업을 미국 시장에 출시해 점유율을 높이려는 현대차그룹의 전략에도 차질이 빚어질 것으로 우려된다.
이호근 대덕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전기차 시장이 초기이기 때문에 시장 점유율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2025년 완공될 조지아 전기차 공장 건립 시기를 최대한 앞당기면서 중간에 공백이 있는 기간 동안 현대차와 기아가 줄어드는 세액공제 금액만큼 인센티브를 줘 실질적인 구매 가격을 낮춰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2020년 기아는 국내에서 친환경차 인증을 받지 못한 쏘렌토 하이브리드의 사전 계약자에 한해 세제혜택 금액을 대신 부담한 바 있다. 올해 상반기 현대차・기아의 미국 판매량(3만2000대)을 기반으로 내년 현지에서 6만대를 판매한다고 가정하더라도 약 6000억원(대당 1000만원)의 추가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재일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한국은 미국과 FTA를 체결한 국가인 만큼 단기적으로는 부품 단위로 수출한 뒤 최종적으로 차량 조립만 미국에서 하는 녹다운(KD) 방식으로 보조금을 지급받을 수 있다”면서 “이럴 경우 중국산 배터리 소재 비중만 낮추면 된다”며 대안을 제시했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상황이 보다 급박해지면 노조와의 협의를 통해 앨라배마 공장에서 다른 전기차 차종을 생산하는 방안을 강구해 볼 수도 있다”면서도 “미국에서 전기차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배터리뿐만 아니라 각종 부품의 공급 방안이 1년 이상 전에 세워져야 하는 만큼 당장은 쉽지 않아 고민”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