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정진영 기자]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기타리스트를 바라보는 시선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가수의 보조자 내지 반주자에 불과하다. 음반 시장이 위축돼 가수들조차 앨범 단위로 신곡을 발표하기 어려워 싱글 발매로 연명하는 상황에서, 조연인 기타리스트가 자신의 솔로 앨범을 발표하는 일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기타리스트 유병열은 이 같은 현실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자신의 솔로 앨범을 발표해 온 보기 드문 연주자이다.
유병열의 이름이 낯선 이들에게도 윤도현밴드(현 YB)의 히트곡 ‘가리지 좀 마’ ‘먼 훗날’은 익숙할 것이다. 유병열은 윤도현밴드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며 히트곡을 작곡했던 주인공이다. 윤도현밴드 탈퇴 후 밴드 비갠후를 거친 그는 현재 밴드 바스켓노트의 리더로 활동하며 자신 만의 음악세계를 개척하고 있다. 솔로 앨범 ‘아이 엠(I Am)’을 발표한 유병열을 지난 11일 서울 망원동의 연습실에서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유병열은 “첫 솔로 앨범의 수록곡이었던 ‘후 엠 아이(Who Am I)’ 이후 스스로를 관찰하는 과정은 내가 음악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작업이었다“며 “솔로 앨범은 극히 개인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신을 살펴야 하고, 그렇게 만든 결과물이기 때문에 앨범 타이틀을 ‘아이 엠’으로 지었다”고 밝혔다.
유병열은 지난 2010년 ‘YBY 1ST Mini Album’, 2011년 ‘유병열’s Story of 윤도현’ 등 2장의 솔로 앨범을 연달아 발표했다. 당시 그는 록이라는 큰 뼈대 위에 퓨전재즈 스타일의 다채로운 구성의 곡과 탁월한 연주를 선보이며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번 앨범은 전작의 다소 복잡했던 부분을 덜어내고 자연스러운 느낌의 연주를 더한 것이 특징이다.
유병열은 “처음 솔로 앨범을 발표했을 당시엔 록 기타리스트를 바라보는 편견을 깨려고 다양한 음악과 연주를 담았는데, 그런 의도를 이미 두 장의 앨범으로 보여준 만큼 이번에는 그저 감정이 움직이는 대로 연주했다”며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 리듬을 살리고 멜로디 라인을 선명하게 드러내 내가 들어도 지겹지 않은 앨범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앨범에는 블루지하면서도 격정적인 연주가 비장함을 연출하는 타이틀곡 ‘아이 엠’을 비롯해 유병일이 직접 보컬을 맡아 절제된 연주를 들려주는 ‘낯선’, 보사노바 리듬으로 상쾌한 느낌을 살린 ‘비트 하이(BeatHigh)’, 봄의 희망적인 분위기를 서정적인 멜로디로 표현한 ‘스프링(Spring) 2015’, 빠른 리듬의 록에 펑키한 연주를 가미한 ‘로드 러너(Road Runner)’, 블루지한 선율로 도시인의 삶을 묘사한 ‘라이트 오브 시티(Light of City)’ 등 9곡이 수록돼 있다. 다양한 장르의 요소들을 뒤섞은 다채로운 곡들이 지루할 틈 없이 이어지지만, 유병열은 자신의 음악적 뿌리가 록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는 강렬한 톤의 연주를 전면에 내세운다. 다소 무거운 리듬과 묵직한 연주로 앨범의 마지막 트랙을 채우는 ‘헤비 바운스(Heavy Bounce)’는 그 명백한 증거이다.
유병열은 “솔로 연주 앨범은 밴드의 앨범과는 달리 개인적인 생각과 느낌을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수록곡들의 연주와 곡의 스타일이 똑같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며 “록이라는 색깔을 확실하게 가져가되 다양한 장르의 벽을 넘나들 수 있는 연주를 들려주는 것이 내 음악적 지향점”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솔로 앨범은 또 다른 나를 보여줄 수 있는 작업이기 때문에 들어주는 사람이 존재하는 한 제작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며 “다음 앨범을 기대하게 만드는 연주를 들려주는 기타리스트이고 싶다”고 덧붙였다.
유병열이 애용하는 기타는 국내 악기 업체 ‘길모어’의 제품이다. 일부 연주자들이 펜더(Fender), 깁슨(Gibson) 등 고가의 해외 브랜드 기타만 찾는 현실과 대조되는 모습이다.
유병열은 “연주력이 궤도에 오르면 그 다음부터는 본인의 몫이지 기타에 기댈 필요는 없다”며 “국내 브랜드 기타의 완성도는 이미 세계적인 수준이고 어떤 부분에선 해외 브랜드보다도 낫기 때문에, 악기보다 연주에 더 신경을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자신의 연주 철학을 전했다.
유병열은 이번 앨범의 판매를 유통사에 맡기는 대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직접 팬들에게 판매하는 파격적인 시도를 했다. 그는 팬들로부터 선주문을 받아 앨범을 직접 우편으로 배송했다. 놀랍게도 그는 SNS를 통해 앨범 물량 대부분을 판매하는데 성공했다.
유병열은 “어차피 무슨 마케팅을 벌여도 앨범이 팔리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그럴 바엔 차라리 내 음악을 진지하게 들어줄 팬들에게 직접 앨범을 판매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이 같은 시도를 통해 내 음악과 연주를 사랑하는 팬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팬들 하나하나가 소중해졌다. 내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던 뜻 깊은 경험이었다”고 고백했다.
유병열은 다음 달 29일 오후 5시 서울 서교동 롤링홀에서 생애 첫 단독 콘서트를 벌인다. 그가 기타를 잡은 지 32년 만에 갖는 첫 솔로 단독 콘서트이다. 유병열의 어린 아들도 함께 무대에 올라 드럼을 연주해 콘서트에 의미를 더할 예정이다. 유병열은 “이번 단독 콘서트는 오랜 세월 기타를 연주해 온 스스로에 대한 보상”이라는 말로 벅찬 소감을 전했다.
유병열은 “이젠 내 이름을 걸고 콘서트을 열어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는 됐다는 생각이 들어 단독 콘서트를 마련했다”며 “꾸준히 앨범을 발표하고 콘서트를 여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후배 연주자들에게도 길을 터주고 싶다”고 바람을 드러냈다.